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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하지 맙시다

좁은길을 걸으며 2005. 8. 7. 15:09


                             아침 햇살이 비칠 때 찍었음 나팔꽃 모음...아 이 행복 커...

 


                  시기하지 맙시다         2005/08/07/주일/

                               (잠언14장장30절)              전주서광교회 이송로목사


“건전한 마음(마음의 화평)은 육체의 생명이나 시기(Envy)는 뼈를 썩게(The Rottenness of the Bones) 하느니라”(잠언 14:30)


날 격언에 “건전한 마음에 건전한 생각이 깃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선한 사람은 그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마음에 쌓은 악에서 악을 내느니라”(마12:34,35)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평소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마음 가꾸기를 잘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의 정원으로 봤을 때, 마음을 잘 가꾸지 못하면 잡초가 무성해진 정원처럼 시기, 미움, 다툼, 살인, 음란, 사기, 탐욕 등의 잡초가 무성하게 자랍니다.

이런 마음에는 건전한 생각이 깃들 자리가 없기 때문에 실패의 삶의 자리에서 방황하기 일쑤입니다.


우리 마음의 정원 가운데 아마도 시기(猜忌)보다 더 교활한 죄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시기심이란 해악이 무서운 결과를 가져다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그리 심각한 죄로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마음속으로 시기를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시기(猜忌)’라는 말은 영어로는 ‘Envy’이고, 독일어로는 ‘Neid’라고 하는 말로 쓰입니다.

웹스터 사전은 시기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다른 사람의 뛰어남이나 형통을 보고 동일한 이익을 소유하려는 욕망과 증오를 수반하는 분함, 굴욕, 불만, 또는 불쾌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무서운 죄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싫어하시는가에 대해서 오늘 본문 잠언서 14:30 보다 더 잘 표현하는 구절은 없을 것이다.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보다 쉽게 번역을 하면 “건전한 마음은 육체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만드니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에서 시기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시기는 얼른 겉으로 나타나지 않고 속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일단 시샘이 생기면 ‘배앓이’가 생긴다는 얘기입니다. 그 배앓이는 일종의 ‘욕심의 잉태’입니다.

그러니까 “사돈이 논사면 (은근히) 배 아프다.” 이렇게 시기는 항상 변장을 하고 나타나는 마음의 무서운 적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시기가 몰고 오는 파장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입니다.


거짓은 시기의 신실한 친구이입니다. 시기는 시기 당하는 자 뿐 아니라 시기하는 자 모두에게 차명타를 가하고 맙니다.

시기는 시기 당하는 자에게 심한 상처를 주며, 시기하는 자의 뼈를 썩게 만듭니다.

따라서 시기는 시기당하는 자보다 시기하는 자가 훨씬 더 손해를 본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시기하는 자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시기는 가슴속을 곪게 하며 몸과 마음을 불안 가운데 있게 한다. 그 마음에 온통 거짓된 것과 더러운 욕심만 가중시킬 뿐입니다.


여러분, 혹시 ‘가인 콤플렉스’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나는 심리학을 전공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서두에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보듯이 가인의 하나님께 거짓된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동생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이 때에 가인은 자기 자신의 잘못된 처신을 생각지 않고 동생 아벨을 시기한 나머지 미움이 싹텄고 결국 아무도 안 보는 데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이것을 독일의 학자 롤프 하우블은 ‘가인 콤플렉스’라고 칭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시기하는 자는 망하게 되고 시기를 당한 쪽은 항상 승리자가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그가 꿈을 형들에게 이야기 했을 때 형들로부터 시기의 대상이 되고 결국 미움을 받게 되더니 어느 날 구덩이에 빠뜨려서 죽이려 했다가 결국 애굽 상인들에게 팔려가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을 미워하거나 앙갚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애굽에서 성실하게 행함으로 인정을 받아서 총리대신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형들과 그 가족을 다 먹여 살리는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시기했습니다.

그의 눈에는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후 백성들에게 환심을 샀으므로 자기의 인기가 떨어지고 나면 다윗이 왕위에 오를까봐 처음부터 두려워하면서 시기하게 되고 그 시기심은 미움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10년 이상을 다윗을 추격하는 데 시간과 정욕을 낭비하고 결국 그 시기심 때문에 인생을 망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다니엘이 왜 사자 굴속에 들어갔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위치가 세 명의 총리 중에 끼게 되자 시샘을 하던 방백들의 음모에 의해서 결국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오히려 다니엘은 살아나오고 그를 시기하던 방백들이 사자굴 속에 던져져서 사자의 밥이 되는 사건의 전말을 보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큰 범죄를 유발시킨 것은 시기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시기(猜忌)가 얼마나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 손해를 가져다주는가를 알고 우리는 시기심을 버려야만 합니다.

하나 더 우리 각자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시기라는 것이 항상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바로 ‘내 안에’ 시기심이 들끓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남녀간의 질투는 어느 정도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 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여자의 질투는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할 만큼 무섭습니다.

남자들은 질투 할까요 안 할까요? 남자의 질투는 한 여름에도 눈이 내립니다.

신라시대에 두 원화의 질투로 한 사람이 죽음으로써 원화제도가 폐지되었고, 조선왕조에 등장하는 장록수나 장희빈 등 후궁들의 질투는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호메로스의 시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은 왕비 헬레네의 질투 때문에 생긴 전쟁이며, 유럽의 백년전쟁도 엘레오노르 왕비의 전남편인 프랑스왕 루이7세와 새 남편인 영국왕 헨리2세와의 질투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씀하는 질투는 남녀간의 질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근본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시기심은 일종의 죄의 씨앗에서 나오는 인간의 나쁜 본성으로 누구에게나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시기에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면, 인기가 높아지는 것을 자신도 고개를 쳐드는 것이 시기입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하는 말이 “제까짓 것이 뭔데?”하면서 ‘부러워하는 마음’을 넘어서서 ‘미워하는 맘’을 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것이 밖으로 표출될 때에는 공동체의 분열을 야기 시키기도 하고 궁극적으로 살인까지 몰고 가는 무서운 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기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분노는 잔인하고 진노는 포악하거니와 시기 앞에야 누가 능히 서리요?"(잠27:4).

역사적으로 볼 때, 아무리 좋은 사람도, 아무리 훌륭한 가정도, 아무리 위대한 나라도, 아무리 뛰어난 모임도 시기라는 바위 위에서 산산조각이 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오늘 날 우리 정치사를 보십시오.

노벨 평화상을 탔어도 “돈 주고 샀다!”는 발언을 버젓이 할 정도면 할 말 다 한 것 아니겠습니까?

과거의 선거 때에 보면, 흔히 “아무개가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망한다!”는 등식을 가지고 흑색선전을 하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 말 한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더 어렵게 만들어놓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정치 지도자나 세상 사람들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또는 교회 가운데서 일어나는 어려운 문제들도 알고 보면 ‘시기심’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분열이 있습니까? 왜 분리된 상태가 지속되지 아십니까?

왜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들 가운데 질투가 있습니까?

알고 보면 내가 그 위치에 못 올라가니까 괜히 시샘을 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못하면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오히려 칭찬해 줘야 하는데, “저 사람이 돈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생색을 내!”하면서 깎아내립니다.

우리 서광교회는 이런 분이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에 다행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언제라도 고개를 들고 튀어나오려고 하는 시기심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기에 이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항상 겉과 속이 일치해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잘 하거나 잘 되는 것이 배 아픈 사람은 얼른 십자가 앞에 나가 회개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시기’가 ‘육체의 행위(일)’(갈5:21) 의 목록 가운데 들어있음을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마치기 전에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화나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 것이니라."(갈 5:26)고 당부했습니다.


고린도인들에게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3).

왜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이런 말씀을 했을까요?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지 아니하고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그리고 누구는 누구를 안 좋아하고...!” 시각으로 뭉쳤기 때문에 교회가 어지러웠던 것입니다.

‘사람 중심’으로 뭉친 교회는 결국 분열을 야기시키고 상대편을 적으로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이 ‘시기심’이 가져다주는 무서운 해독입니다.


아, 시기는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우리 마음속에서 티끌만 한 시기를 발견하였습니까? 잠시라도 시기를 허용하지 말고, 조그마한 움직임에도 즉시 심판을 내리십시오.

“하나님, 내가 이런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되지요? 나의 더러운 탐욕을 용서해 주십시오!”

성경 전체를 보면 시기는 분노, 미움, 다툼, 살인으로 연결된다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마음속에 시기심 자체가 들어올 때에 처음부터 배격을 해 버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기심을 극복하는 가장 바람직한 제안’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달란트를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내가 갖지 못한 좋은 솜씨나, 좋은 성품에 대하여 칭찬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합시다.

내가 가진 것이 소중하다면 다른 사람이 가진 것도 소중합니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면 각 자에게 주어진 탈랜트가 소중하고 아름답습니다.


다음은, 건전한 이상을 품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역시도 누구를 시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높은 이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꿈과 이상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마음에는 잘못된 콤플렉스에 노출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늘 화목을 도모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마귀는 늘 시기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갈등하면서 치고 박고 전쟁하고 죽이도록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의 반대쪽에서 있어야 합니다.

“화평케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8).

가만히 있으면 나도 모르게 그런 쪽에 휩쓸려 다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만큼 적극적으로 화목을 도모하는 일에 서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시기는 틈 탈 기회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리는 다시 한 번 마음 밭을 ‘건전한 마음 밭’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마음 밭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누구를 시기해 본 적이 없으신 가장 건전한 마음이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