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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보람차게

좁은길을 걸으며 2005. 7. 31. 14:17


이 사진은 전주서광교회 울타리에 심어서 가꾼 목사님의 작품입니다. 2005년 하늘나라 특선작 ㅎㅎㅎ

 

                    오늘을 보람있게

                    (히브리서3장12-19절)                    2005/07/31/주일

                                                      전주서광교회 이송로목사


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날마다 ‘오늘이라는 현실’을 마주 대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지금’이라는 말로 바꾸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과거가 있었고, 다가 올 미래의 문제들이 남아 있지만 ‘오늘’이라는 현실 속에서 과거를 추억하기도 하고 미래를 전망합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항상 나에게는 지금만 있습니다!” 10년 후에 내가 살아있다면 그때도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지금(부터) 잘 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하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라고 할 때에 자칫하면 ‘오늘’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항상 도둑맞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오늘 잘못하고 있는 사람이 내일 잘 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나와 있지만 오늘이 소중한 것은 여러분이 이 하나님의 진리를 들을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바로 오늘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아마 두 귀를 쫑긋 세우고 한 말씀도 놓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란 놈은 항상 미래를 들먹이며 장난을 칩니다. 오늘 회개하고 예수 믿으라고 하면 “내일 잘 믿자!” 오늘 주님 앞에 충성하라고 하면 “오늘만 날이냐? 다음에 열심히 하면 되지 뭐!” 항상 이런 식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늘을 잘못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을 바르게,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 오늘을 소홀히 여기면서도 밝은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허왕된 꿈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지 모릅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야망을 버리고 오늘을 바르게 살아가는 지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 지혜를 가르쳐 주는 것이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책을 펴게 되면,  ‘오늘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합니다. 성경책은 옛날 역사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을 세우실 때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날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신5:3).

이런 면에서 성경은 역사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이며, “영생의 말씀”이며, 나아가서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이 순간도 ‘지금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꼭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막연한 미래만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지금 오라 지금 오라 자비한 주께로 지금 곧 나아오라~]

13절을 보십시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팎케 됨을 면하라.”

여기서 'Today(오늘)'라는 말은 하루 24시간 오늘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Now(지금)’이라는 현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예수 믿는 우리들은 지금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現在)에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갑자기 튀어나온 이야기가 아닙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를 돌아보면서 “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가?”는 큰 주제를 가지고 하는 얘기 속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그들이 3500년 전 그때의 ‘오늘’이라는 날을 잘못 살았기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이집트에서의 430년간의 종살이 청산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의 지도에 온전히 따르지 않고 자그마한 어려운 일만 봐도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마음을 곱게 쓰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기들을 인도하는 지도자 모세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하는 데까지 갔습니다.

결국 40일이면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을 가나안 땅을 40년 동안이나 배회하면서 광야 엎드려져서 죽게 되었습니다.


현실이 좀 고달프고 힘이 들어도 그 날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보람차게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하고 완악한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마음의 완악함은 결국 하나님을 불신앙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신앙하는 백성들 같이 보였지만 막상 그들 앞에 어려운 일이 봉착했을 때, 믿음의 행위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교훈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큰 거울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도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얼마든지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에 몸담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그러나 항상 마음을 아름답게 쓸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12절 말씀을 거슬러 올라가서 읽어봅시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이것은 교회 밖의 불신앙이 아니라, 교회 안의 불신앙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무서운 교회의 적입니다.

‘떨어지다(헬:아포스테나이)’라는 말이 그대로 영어로 옮겨져 와서 ‘배교(apostasy)’라는 말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이런 사람만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배반자’, 또는 ‘배교자’가 되는 것 말입니다.

특히 오늘날 배교의 형태는 개신교의 아름다운 신앙을 저버리고 천주교로는 가버리는 것으로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천주교는 이미 복음의 참된 신앙에서 벗어난 지 오래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13절을 다시 봅시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팎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오늘 해야 할 일은 ‘서로 격려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소중한 것들을 망각해 버리기 쉽습니다.

‘권면하다(헬:파라클레시스)’라는 말은 영어에서 ‘Exhortation’말인데, 이 말의 의미는 ‘한 사람에게 그의 임무를 잘 수행하도록 동기유발을 시켜주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믿음이 약한 자들을 권면해서 열심을 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내가 볼 때는 우리 서광교회 성도님들이 이런 것을 알게 모르게 매우 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행여 누가 좀 열심을 내고 잘 하는 것을 보고서 깎아내리려는 생각이 들어온다면 그것은 분명히 ‘시기심’이라고 무서운 적이 나를 공격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나타해지고 열심이 식은 교우에게는 ‘권면’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앞자을 서는 분에게는 ‘격려와 칭찬’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이 결국 교회 안에서 실천되어지는 아가페(agape)로 드러나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우리가 언제 해야 합니까? 바로 ‘오늘’입니다.

은혜 받는 것도 오늘 받아야 하듯이 사랑하는 것도 오늘 해야 합니다. 혹시 누구하고 사과해야 할 일이 있으면 오늘 해야 하고, 또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는 것도 바로 이 순간 ‘오늘’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을 묵살하고 묵혀 두면 어느 새 마음이 굳어져서 다시 완악해지고 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이라고 부르는 이 시간에 서로를 권면하고 격려하고 칭찬하는 일에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우리는 늘 초심(初心;one's original intention)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14절입니다.

“우리가 처음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여러분의 마음에 자리잡은 초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을 향한 ‘처음 사랑’(계2:4)이 아닐까요? 맨 처음 복음을 깨달았을 때, 또는 처음으로 회개의 눈물을 흘렸을 때, 아니면 정말 세례받을 때의 그 감격, 또는 처음 직분을 맡았을 때의 새로운 다짐들을 생각해 볼가 있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그 다짐대로만 나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기억을 더듬어서 바로 그 때의 결심을 오늘이란 현실 속으로 끌어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때의 결심, 즉 처음에 가졌던 그 굳센 믿음을 다시 굳세게 붙잡고 나신다면 이것이야말로 오늘을 보람차게 사는 비결이요, 지혜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드는 보람과 행복이 뒤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크리스챤들이 초심에서 벗어나서 딴 것을 찾고 있습니다. 괜히 속상할 일도 아닌데 쓸 데 없는데 관심을 두다가 시험들었다고 말합니다.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처음사랑을 회복 받아야 합니다.


리는 오늘을 보람차게 사는 것을 잘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현재에 늘 부정적인 생각만 한다면 미래는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까?

오늘이라고 하는 이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늘은 짧은 하루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어떤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따라서 내일 하겠다고 핑계하지 마십시오.


Thomas Lowell은 “오늘은 우리의 가장 귀중한 재산이다. 그것이 우리의 유일하고 확실한 재산인 것이다”고 했습니다.

오늘의 가치와 시간의 소중성을 아는 자의 말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하와이 촌을 건설했던 헨리 J. 카이젤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나의 성공은 오늘이라는 시간 선용을 잘했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에 모인 것, 대단히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결심하고, 무엇을 붙잡고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만일 지금 여러분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일치한 마음을 품었다면 ‘보람찬 오늘!’이 될 것이며, ‘확실한 미래!’ 또한 보장이 되어있다 하겠습니다.

내일을 오늘로 밝히십시오. 오늘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가장 보람찬 일에 사용하십시오. 잘 산 오늘은 모든 어제를 기쁜 꿈으로 만들고 내일을 소망의 비전으로 만들게 될 것입니다.

오늘을 보람차게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