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은 이송로목사가 직접 찍은 사진입니다. 그냥 비듬꽃이라 부르겠습니다.
원숙한 신앙으로 2005/07/24/주일/
(시편131편1-3절) 이송로목사(전주서광)
우리는 교회 나오자마자 신앙이 다 자란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교회 나와서 진리의 말씀을 깨닫기 전에는 씨를 심어놨으나 아직 싹도 나지 않은 상태와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받는 순간부터 믿음이 싹이 나서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도 시련이 오면 잘 자라지 못하고 한동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련을 겪은 다음에 더욱 더 튼튼하게 자랄 수 있다는 것이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다윗은 믿음의 시련을 누구보다도 많이 겪었습니다.
그는 잘못한 일도 없지만 사울 왕의 미움을 받아 도피생활을 10년 이상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세월은 그냥 결코 허송세월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도피생활을 통해서 더욱 더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난 부분이 하나씩 둘씩 다듬어져서 훌륭한 신앙인격체로 성장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 성장 끝에 다가오는 것들은 너무나도 소중한 인생의 열매들이었습니다. 이것을 나는 ‘성숙(成熟)’이라고 표현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또 다져지면 ‘원숙(圓熟)’이라는 신앙인격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합니다.
‘성숙’과 ‘원숙’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단계로 표현한다면 ‘성장’?‘성숙’?‘원숙’이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성장이 있는 사람에게는 성숙을 향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숙에서만 머무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원숙’으로 가야합니다.
‘원숙(maturity; mellowness)’이란 ‘무르 익다’, ‘인격, 지식, 신앙이 오묘한 지경에 이르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윗은 나이가 많아서 원숙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이 이제 설흔살 이쪽저쪽이었지만 원숙함이 있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인격이야말로 원숙함 그 자체였습니다.
1. 다윗은 그 원숙함은 겸손으로 나타났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니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니이다”(1절).
오늘 말씀에 나타난 ‘마음’이란 것은 ‘레브’라는 말인데, 인간의 지혜와 지식 중심부이자, 도덕과 신앙의 중심부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원천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부패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교만해져서 얼마든지 악으로 전락되기 쉽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바르게 모시지 않는 마음은 늘 허왕된 꿈에 사로잡혀 자기가 최고인 줄 알고 하나님도 몰라보고 이웃도, 부모형제도 몰라보는 어리석음으로 치닫고 맙니다.
그러나 원숙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언제든지 자기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행동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도 겸손의 미덕이 없는 사람은 결코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조금 무엇을 가졌다고, 학식이 좀 높다고, 무슨 업적이 좀 있다고, 권력을 손에 쥐었다고 날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전락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마음 낮추기’를 잘 해야 합니다. 이것을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되지도 못하고 된 척 하는 사람은 교만하여 날뜁니다.
깊은 물은 찰랑거리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깊이가 없는 사람은 얼마나 촐랑새마냥 촐랑대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네 사람을 보면 참 재미가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상태를 우리는 한 눈에 읽을 수 있습니다.
전두환씨는 총칼로 정권잡고 ‘정의구현’한다고 써 붙어놓고 애매한 사람들 잡아다가 고문시키는 잔혹한 행동을 했습니다.
노태우씨는 그는 ‘보통사람론’을 주창하더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물쩍 구렁이 담 넘어가는 식으로 물탄정치를 하고 일관하고 말았습니다.
김영삼씨는 ‘문민정치론’을 펼친다더니 혼자 잘 났다고 날뛰며 너무나 가볍게 행동하고 말을 하더니 가치가 떨어지고 결국 IMF까지 몰고 왔습니다.
그러나 김대중씨는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듬직했습니다. 그에게서 항상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깊은 물속이었습니다. 그에게서 행여 보복정치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는 정말 과묵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정권 때 단 한 명도 사형집행을 하지 않은 쾌거를 남겼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인간의 원숙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서 생각할 것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헛된 꿈을 버려야 합니다.
오히려 원숙함을 배우고 현재의 시련을 잘 극기해 나가는 인내를 배워야만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은 그 사람의 인간됨을 보시고 아주 귀하게 쓰십니다.
그런 면에서 다윗은 자신이 스스로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 궤략을 꾸미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사울왕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사울은 항상 정권유지에만 전전긍긍하며, 백성들이 다윗을 지지하는 것 같으니까 스스로 위협을 느끼고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2. 그 원숙함에는 평화가 깃들어 있습니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같도다”(2절).
믿음이 없는 사람은 마음이 불안하고 근심 걱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미 자신의 생애 자체를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나니까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젖뗀 아이의 평화로운 모습을 보셨습니까?
그러나 헛된 궁리, 헛된 야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마음의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항상 무엇에겐가 쫓겨다니면서 사느라고 “바쁘다 바뻐!”하며 동분서주하지만 결과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니까 늘 쫓겨다니며 사니까 마음이 행복이 없습니다. 늘 피곤하고 스트레스가 쌓이고 그러다가 결국 병이 나면 남을 원망하는 곳으로 갑니다.
그러나 다윗은 엄청난 시련 가운데서도 성격이나 행동이 모가 나지 않고 인생의 원만했습니다.
왜 이것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함 속에 ‘맡겨버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잠16:3). |
그러니 때로는 사울에게 발각이 되어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내 편이라 그는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마음이 불안하거나 스트레스가 쌓일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내가 만일 당신처럼 그렇게 힘든 처지에 있다면 나는 도망가버리지 절대로 그 사람과 못살겁니다.”라고 말하지만, 믿음이 좋은 사람은 “아니에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까 한 번도 힘들다고 생각지 않고 당연히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해 오며 살았어요. 나는 결코 불행하지 않아요. 행복해요.”라고 하며 미소를 활짝 띠우게 될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마음이 불안하니까 갈수록 정신병원이 호황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딴 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큰 문제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마6:34).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아무런 방책도 없이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임마누엘로, 여호와 이레로 함께 계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오늘 죽어도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요? 오늘 죽으면 하늘나라, 즉 천국에 가지 않습니까?
가불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일’이라는 것은 ‘오늘’이라는 결과의 산물입니다. 오늘 우리 현실에 충실하면 내일은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헛된 궁리, 헛된 욕심에만 매달리는 사람은 장래가 불안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바로 오늘을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아무튼 마음의 평온 속에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어 보십시오. 바로 여기에 원숙함이 있습니다.
3. 아무 일을 만나도 하나님만 바라는 신앙입니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3절)
오늘의 우리들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들끼리는 죽고 못 살 만큼 원만한 관계에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엉망진창인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모임은 안 빠지고 다 쫓아다닙니다.
그래서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5일 근무제가 시행되면서 하루 더 쉬니까 훨씬 좋을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우리 스스로가 속는 경우에 해당됩니다.
성경은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라!”(출20:9)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기고 나가는 인간들이 얻는 유익보다는 잃어버리는 게 훨씬 많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연휴를 즐기느라고 소속된 교회를 이탈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서서히 영적으로 병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등한시하는 사람이 결코 행복할 수 없듯이 자신이 섬겨야 할 교회를 이탈해서 이리저리 떠돌기 시작하면 그 신앙은 다 까먹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시대적으로 말세의 지말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떤 삶의 자리로 나가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신본주의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불행의 뿌리는 하나님을 떠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면 결국 행복한 인생으로 마치게 되어 있지만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가야 할 곳은 지옥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품 안에 있어야 행복합니다. 그런데 왜 인생들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 바른 길을 저버리고 살아갑니까?
어린 애들부터 어른까지 세상의 화려한 유혹이 길 모퉁이에서 “이리와서 나랑 놀아요!”하며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인생을 도살장으로 끌고 간다는 것을 망각하기 때문에 헤어나오지를 못하고 점점 깊이들어가서 우리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리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그리고 나서 인생 말년에서야 “아이구, 여태까지 좋은 다 보내고 헛되게 살았구나!”하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인생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는 중에도 매순간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대지’ 작가 펄벅 여사의 어머니 캐롤라인은 네덜란드 청교도 신앙 정신을 이어받아 미국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선교사인 남편 사이든스트리커(A.Sydenstricker)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와 청강포라는 지역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었습니다.
그때 남편은 다른 지방으로 전도 여행을 떠났고, 집안에는 세 자녀와 중국인 가정부만 남아 있었습니다. 가뭄이 계속되던 어느 날, 캐롤라인이 창가에서 바느질을 하다가 밖에서 중국인 남자 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비가 오지 않고 가뭄이 계속되는 원인은 서양인들이 이 지방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야. 그러니 오늘밤에 선교사 가족을 죽여서 신에게 바치세.”
이 이야기를 함께 들은 가정부는 자신에게 친절히 대해 준 캐롤라인을 보고 울면서 이번 일 만큼은 당신을 도울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캐롤라인은 걱정이 되었고 두렵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골방으로 들어가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기도 드린 후에 마음에 평안을 느끼면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저녁이 되자, 그녀는 평소보다 일찍 아이들을 재우고 자신은 창가에서 바느질을 하면서 계속 귀를 기울였습니다.
자정쯤 되었을 때 그녀의 집을 향해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녀는 가정부에게 차와 케이크를 준비하도록 이르고 마치 귀한 손님을 맞이하듯 문을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집안으로 들어와서 자고 있던 아이들을 깨워 옷을 입히고 데리고 나와 노래하고 이야기하며 놀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몇몇 중국인들이 마당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음성을 낮추어 친절하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어서 들어와서 함께 다과를 나눕시다.”
그때 중국인 한사람이 “이상하다? 우리가 무섭지 않은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캐롤라인은 “이웃에 사는 여러분을 무서워할 이유가 있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중국인들은 건들거리며 집안을 둘러보고 이것저것 만져보기도 했습니다.
캐롤라인은 오르간 옆에 앉아 중국말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비할 데 없는 존귀한 이름의 우리 주여..........”찬송을 끝났을 때 방안은 조용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 모인 중국인들은 얼굴을 마주보고 멋쩍어 하면서 하나 둘씩 돌아갔습니다.
캐롤라인은 의자에 앉아 안도의 숨을 내쉬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날 새벽 기적같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캐롤라인은 가장 잘박한 순간에도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녀를 도우셨고 그녀의 마음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이것이 행복입니다.
그러나 땅엣 것에만 눈을 돌리면 헛된 욕심이 들어오고 결국 이루지 못할 헛된 꿈만 꾸다가 저 멸망의 곳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현실이 답답하고 힘이 듭니까?
그럴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바라보는 맘은 가장 멀리 바라보는 마음에는 원숙함이 깃들여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는 자는 하나님이 그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