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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이 닥쳐왔을 때

좁은길을 걸으며 2005. 7. 17. 14:21

                               시험이 닥쳐올 때               2005/07/17/주일/

                                    (창세기6장1-5절)                  전주서광교회 이송로목사


우리 인생 앞에 반갑지 않게 늘 찾아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험이라는 달갑지 않은 손님입니다.

흔히들 시험을 만나면 마음이 괴롭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지기도 하고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고민과 근심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시험을 두 가지로 크게 나눕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시험(test)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여부를 보시기 위해 테스트하신 것입니다.


학생들은 일정한 기간 수업을 받은 것을 다시 한 번 숙지하고 그것을 기억이라고 하는 그릇에 담기 위해서 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이것을 잘 통과하면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얻게 되고 또 원하는 상급학교에 진학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다음에는 마귀의 유혹(tempt)입니다.

이것은 우리 첫 조상 아담이 당한 시험입니다. 이것에 지면 반드시 죄를 범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 시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유혹은 항상 우리 인간에 화려한 욕망을 불러일으켜서 넘어지게 만듭니다.


그리고 한 가지 꼭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 하시지만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시지는 않으십니다.


1. 시험을 만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다에는 항상 크고 작은 파도가 있듯이 우리 인생 앞에도 항상 크고 작은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험이 닥쳐오는 것 자체가 없기를 바라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시험이 없다고 말하거나 시험 자체를 거부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사명이 있는 사람에게는 시험이 찾아옵니다.

우리 예수님 앞에도 역시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같은 인생이 아니시기에 시험받을 필요가 없으시기도 한 분이지만 인류를 구원할 사명을 가진 그분 앞에도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다른 점은 우리는 시험에 넘어질 때가 많지만 예수님은 한 번도 시험에 넘어지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은 완전무결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능히 시험에서 승리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첫 번째 아담을 시험하고 또 예수님을 시험했던 사단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시험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시험을 만났을 때 어떤 자세로 맞이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2절).

우리는 덜컥 겁부터 집어먹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오늘 성경에서는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나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라면서 어떤 집에 가면 달려드는 개를 봅니다. 그러면 어쩔 땐 얼마나 겁이 나든지 머리카락이 쭈빗하게 섭니다. 그럴 때 도망만 가면 그 그에게 물리고 맙니다.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겁이 나지만 순간 개에게 탁 돌아서서 맞대항할 자세를 취하면 쫓아오던 개가 오히려 놀라서 도망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물속에 빠져들어가는 베드로)


여러분이 시험을 만날 때 겁부터 먹고 당황하거나 부정적인 생각으로 치달으면 마귀는 얼씨구 내 밥이구나 하고 짓밟고 들어오려고 할 것입니다.

시험을 피하려고 도망하지 맙시다. 일단 시험을 기쁘게 여기면서 반격을 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시험이 오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험을 대하는 자세가 더 주요하고 또한 시험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도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시험이 오지 않게 하여 주옵시고”라고 하시지 않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시고”하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2. 더 좋은 신앙인으로 만들어 줍니다


어린 아이가 아프면 부모들은 걱정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자식을 키우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아픈 짓을 하고 나면 꼭 어른 같은 한 마디씩을 하는 것입니다.

더 대견해지고 더 성숙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3절).

우리 서광교회 성도들도 그동안 수많은 믿음의 시련을 겪으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나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아주 모질게 자라온 강한 믿음의 소유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오히려 인내를 배우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세상에서도 우리가 경험한 바이지만 인내 없이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분명히 믿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내는 더 좋은 교회를 만들어가는 기폭제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욥의 인내를 대표적으로 꼽습니다. 욥은 너무나 큰 시련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홍두깨를 만났습니다.

그는 큰 기업가였지만 온 가산은 물론 열명의 자녀들까지 다 죽고 말았습니다. 아니 자신의 몸에까지 악창이 나서 잿더미에 앉아서 신음을 하며 큰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으로서 당할 최고의 고통을 당했지만,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했습니다.


그의 한 마디가 소중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아오리라”(욥23:10).

그는 결국 순금같은 신앙을 소유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4절).

인내를 이루는 사람과 인내하지 못하고 쉽게 절망하고 낙심하는 사람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씨를 심었으면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심자마자 며칠도 안 돼서 싹이 나나 안 나나 땅을 파보는 사람은 인내가 없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농부는 파종에서부터 추수 때까지 인내합니다. 그냥 인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할 때에 좋은 수확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내의 신앙은 ‘좋은 인격’, ‘아름다운 신앙’이라는 열매를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철부지 신앙은 조금만 무슨 일이 있으면 이 말 저 말 하면서 돌아다니고, 또 언제는 열심을 냈다가 또 어느 때는 교회도 안 나왔다가, 언제는 굉장히 열심히  할 것처럼 했다가 어느 날 보면 교회까지 안 나오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인내의 과정을 통과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좋은 인격, 좋은 신앙은 반드시 인내를 통해서 얻어집니다. 그리고 시련을 통과한 자만이 사명을 완수해 낼 수 있습니다.



3. 시험을 이기는 지혜를 구하십시오


우리는 시험이 닥쳐왔을 때 긴장을 안 할 수 없습니다. 정상인이라면 자신 안에서 비상이 선포되고 초긴장 상태에 돌입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지혜롭게 잘 극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시련이 닥쳐오면 그냥 주저앉아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시험에서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처음 교회 나왔다가 쉽게 그만 두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신앙생활 좀 하려고 나왔더니 갑자기 소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소와 신앙! 어떤 것이 중요할까요?

이 사람에게는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신앙의 소중성보다 소가 훨씬 크게 보이고 또 다른 시련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위험부담 때문에 아예 신앙생활을 포기해 버립니다.


여기에 계신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모처럼 열심히 주의 일을 하려고 결심할 때 어떤 성도가 괜히 시비를 걸더니 속을 확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또 가정에서 보다 부부 사이에 좋은 관계를 가지고 살려고 맘먹었을 때 생각지도 않는 일에 자녀가 맘을 푹 쑤셔놓고 사고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시험인 줄을 미처 생각지 못하고 괜히 괴로워하다가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또 사명을 먹을 것을 포기해 버리는 상황으로 갑니다.

그러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귀에게 속아서 지고 만 것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마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바른 신앙생활을 방해한다는 것을 알알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험이 닥쳐왔을 때 먼저 기도할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바로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학생이 시험지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듯이 하나님께 기도하면 문제가 잘 풀릴 것입니다.

그렇듯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나의 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하나님께 아뢰야 할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5절).


우리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니 연약성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시험을 이겨낼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만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한계를 극복하고 연약성을 강함으로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분이 아니시지만 그분도 우리에게 기도의 큰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기도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부를 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눅22:46)

그냥 하시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너희가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빠져서 낭패를 볼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하지 않고 ‘시시콜콜’, ‘코카콜라’, ‘팹시콜라’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계집 종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되고,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시험에 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지혜와 능력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거뜬히  십자가를 지시고 영원한 승리의 주님으로 남으셨습니다.

지금 그분은 우리 시험당하는 자들을 돕고 계십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2:8).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시험이 닥쳤을 때 막연하게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하는 식으로 안일한 자세를 취해서도 안 됩니다.

이 집 저 집, 동네방네 다니면서 떠든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나쁜 쪽으로 일이 잘못 꼬여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 가장 좋은 방향으로 일이 잘 해결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큰 축복이 따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믿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특권입니다.

우리가 지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1)우리로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실 것입니다.

2)시험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3)믿음을 더욱 더 굳세게 해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시험 뒤에는 반드시 승리가 따라옵니다.

어떤 병원에서 젊은 간호사가 처음으로 간호 책임을 지고 의사를 도와 수술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자, 수술이 끝나고 봉합하는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 때 간호사가 의사에게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 사용한 가제는 모두 12개인데 11개 밖에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다 빼냈습니다. 자, 이제 상처를 꿰매도록 합시다.”

“안돼요, 분명히 12개를 사용했습니다.”

“내가 책임지겠소, 봉합합시다.”

“선생님,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간호사는 완강히 거절을 했습니다.

마침내 그 의사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띠우며 자기의 한 뽁 발을 띄우면서,

“보시오, 여기 있소!”하며 바닥에 떨어져 있는 12번째의 가제를 보여주었습니다.

“미안하구려. 내가 당신의 성실성과 능력을 시험해 보았소. 당신은 훌륭한 간호사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험을 허락하시지만, 그 시험을 지혜롭게 이겨내는 자녀들을 보시고 기뻐하시며 승리의 관을 쓰게 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