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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가난뱅이

좁은길을 걸으며 2005. 7. 10. 21:06
 

                      성실한 가난뱅이                  2005/07/10/주일/

                        (잠언28장1-10절)


이스라엘 격언에 “가난은 악덕일 수는 없지만 미덕일 수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악덕은 아니지만 미덕일 수 없기에 이왕이면 부유하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아이 중 하나가 한 번은 제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우리 집 가난한 게 싫단 말이야!”

이런 말을 들을 때 엄마의 마음은 아팠던 모양입니다. 이유는, 목사는 사명 하나 때문에 가난한 것도 감수하고 가지만 아이들은 그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솔직히 저부터도 가난이 싫고 때로는 지긋지긋하기까지 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을 돈으로 움직이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크리스챤들도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이 유혹에서 벗어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억지로 부자가 될 수도 없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지금부터 하나도 사 먹고 싶은 안 사먹고 사 입고 싶은 옷 안 사 입고 가고 싶은 곳 안 다니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러면 되자가 될까요?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11:24,25).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막상 현실 속으로 들어가면 “눈만 뜨면 돈~!” 아닙니까?

그러다 보니 돈이 인생의 목적인 것으로 착각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버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가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보십시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하기에 너무나도 아니다 싶은 것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여들인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로 인해 성실하게 살아가는 백성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받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노동의 댓가 없이’, ‘하는 일 없이’ 잔머리 굴려서 돈버는 사람이 많아질 때 서민과 빈민들은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아야 하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부자들은 그런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는 양심을 갖지 못했습니다.

지금 일용근로자들과 저속득자들로 일하는 자들은 정말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 성도들이 선택해야 하는 인생의 가치는 부자가 되는 일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에 있고, 그 과정은 ‘성실’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은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 놓고 모든 것을 평가하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실하게 살아도 부자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실을 포기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만일 성실을 포기하면 비굴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경제신문을 보니까 부자가 3대 원칙이라는 글을 보았더니, 1)수익성, 2)안정성, 3)유동성을 꼽았습니다. 이 셋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말입니다.

수익이 없는데 쓰기만 해도 안 되고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다음 저축도 가능하고 어느 정도의 부동산도 가길 수가 있습니다. 특히 주식에 투자하는  사람이 욕심에 수익률만 생각하고 몽땅 투자한다면 자칫 안정성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역시 돈은 묶어만 둔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항상 돈을 몸의 혈액이 돌듯이 돌아가야만 합니다.

이 새 가지가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수입성부터가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 다음은 생각조차를 못합니다.


아무리 성실하게 일을 해도 일정한 수입이 따라주지 못하는 불균등 사회가 바로 우리나라입니다.


나는 오늘 이런 사람을 일컬어 ‘성실한 가난뱅이’라고 불러보고 싶었습니다.

성실한 가난뱅이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만 불성실한 부자와 불성실한 가난뱅이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시편이나 잠언의 큰 흐름 속에서 의인과 악인을 대조시켜서 말씀하는 것들을 수없이 많이 만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의인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을 망하리로다”(시1:6)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지만 결국 마지막 가는 길은 멸망의 곳으로 갈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가난하게 사는 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난은 결코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죄도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게을러서 가난하게 살았다면 이것은 하나님께 악한 것이 되고 맙니다.

특히 우리가 잠언서를 대할 때 ‘게으른 사람’에 대해 얼마나 많은 질책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로써,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10“4).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궁핍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에 족하리라”(잠20:13).

따라서, 불성실한 가난이 자랑스러운 것이 될 수도 없습니다.


내가 오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실한 가난뱅이’란 말씀입니다.

본문 6절에서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사곡히 행하는 부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가난해도 떳떳이 살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성실히 행하면 부자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이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성실한 가난뱅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주일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가난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주일날 손님이 더 많지만 가게를 닫습니다. 주일에 일하는 직장에 가면 훨씬 많은 봉급과 수당이 주어지지만 기꺼이 사양을 하고 그보다 훨씬 적은 임금을 받으면서 주일을 지킵니다.


때로는 잘 봐달라고 뇌물을 갖다 주면 진급도 잘 되고  또 좋은 자리에 쉽게 앉게 될 수 있지만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았기에 항상 말단의 자리에 있으면서 박봉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이 말씀으로 위로를 주십니다.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시72:2).


그런데 사곡히 행하는 자는 어떻습니까?

‘사곡히 행하다’란 말은 ‘아카쉬’라는 말인데, ‘두 길을 가다’란 뜻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따르는 길과 세상을 따르는 길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따르는 것 같으나 실상 마음은 세상의 이익과 재물을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불균등 사회로 급속도로 가는 이유 중에 하나가 이런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지 않으신지요?

요즘 우리 사회는 이런 요령꾼들이 매우 능력있는 사람으로 비춰지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굉장히 성실해 보이지만 음성적으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부지런하게 살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 것인가를 과연 알기나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야고보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은과 금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약5:1-3).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이미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성실히 일해서 그에 따른 정당한 댓가를 누리고 살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좋지만 그러나 가난하게 될지라도 성실한 가난뱅이가 되자는 말입니다.


나는 우리 서광 성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성실한 가난뱅이입니까?”

“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분이 계시다면 그분에게는 하나님의 큰 위로가 따르게 될 것이고 “실상이 부자입니다.”

진짜 가난뱅이가 누구입니까?

‘세미한 음성’이라는 글에서 “가장 큰 가난은 믿음이 없는 가난이요, 인재가 업슨 가난이며, 봉사가 없는 가난이다!”라고 했습니다.

펜실베니아 스쿨 Journal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은 동전 한 닢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꿈이 없는 사람이다!”

우리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은 궁극적으로 하늘나라를 보라보는 꿈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적으로 볼 때는 결코 가난뱅이가 아닌  부자란 얘기입니다. 그런 분은 ‘믿음의 부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재물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길 수 없다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마6:24).


목사인 나는 우리 서광교회 성도들이 물질적으로도 모두 다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5년 가고 10년 가면 여기서도 틀림없이 물질적으로도 부자가 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할지라도 여러분들은 조금도 위축되거나 기죽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도 가장 부요하신 분이시지만 바로 여러분을 위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고후8:9).

초라한 마굿간에서 나셨고, 목수의 일을 하시고.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하시고, 결국에는 가장 처절하게 십자가에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누구를 위함입니까?

그분이 가난해짐으로써 우리는 부유해졌습니다. 그리스도 복음이 들어간 곳이 다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개인 모두가 잘 살아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가난하게 된 것도 우리 주님 때문입니다.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이런 면에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황금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박혀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늘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하나님이 주인 된 인생을 살지 않는다면 차라리 가난하게 사는 것만 못합니다.

아시스의 성 프랜시스는 부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그는 ‘한 부자 청년의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고서 그 많은 재산을 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실제로 ‘거룩한 가난’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는 못할지언정 성실한 인생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가난하게 살더라도 떳떳한 가난뱅이가 됩시다. 그렇다고 우리는 밥 한끼도 굶지 않은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다만 상대적 빈곤감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이 문제입니다. 부익부빈익빈의 문제가 우리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었지만 그것 때문에 맘 상할 필요까지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실한 가난뱅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13:5).

1)과연 내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2)과연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한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들을 도와주실 뿐만 아니라, 일평생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