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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자다리라

좁은길을 걸으며 2005. 6. 29. 23:14
 

죄를 다스리라                         2005/06/29/수/

                  (창세기4장1-10절)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지금과 같은 인간세상에서 살게 되었다.

이제부터 그들은 척박한 땅을 개간하면서, 잡초와 싸우고 질병과 싸우고 죄와 싸워야 했다.


그들이 가정을 이룬 이상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녀를 선물로 주셨다.

그 이름은 가인이다. ‘가인’이란 뜻은 ‘the one obtained(얻음)’이란 뜻이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시127:3-5).


그리고 또 아들을 낳았는데, 아벨을 낳았다. 그 이름 뜻은 ‘insignificance(허무)’란 뜻이다.

그들은 죄의 결과로 인생의 짐이 얼마나 무겁다는 것을 느끼고 지었던 이름인 것 같다. 그런데 그 이름대로 너무나 일찍 허망하게 이 아들을 잃고 만다.


이 둘은 서로 직업이 달렸다.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를 했다.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말은 “in the course of time”이란 표현인데, “한 절기가 지난 후에”, 또는 “농사의 한 기간(철)이 지난 후에”라는 뜻이다.

그들은 성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당연히 생계의 수단으로 목축업과 농사를 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릴 때가 왔음을 인식하고 있었으리라는 생각이다.

그것은 그 부친 아담에게로부터 물려받은 신앙교육에 따라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 제사는 반드시 짐승의 제사이여야 함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전승 받은 “가죽옷”(3:21)에 대한 얘기가 있지 않는가?


아담은 인간의 속죄를 위해서는 반드시 짐승의 피가 흘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자녀들에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는 피의 제사였을 것이라는 것이 가능하다.

오늘날도 어떤 예배든지 인간의 속죄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십자가의 보혈로 날 씻어주소서!]라고 간절하게 부르짖어야 한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3,4절).

다같이 하나님께 드렸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참된 예배가 있고, 거짓된 예배가 있다.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지켜보고 계신다.

참된 예배란 신약적으로 표현하자면 ‘복음적인 예배’이다.

오늘도 우리의 질문의 하나는, “나는 지금 복음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예수의 피가 철철 흐르는 예배로 나아가고 있는가?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4,5절).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을까?

많은 학자 간의 논란이 있다.

어떤 이는 ‘정성이 부족했다“는 말로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설득력이 없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니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11:5).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

‘그 예물’은 ‘피의 제사’를 뜻한다.

이유는, 히브리서의 얘기가 레위기서를 토대로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도 없다”(히17:11)는  얘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아벨은 ‘피의 제사’만이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드렸다.

그러면서 아벨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셨던 것처럼 그는 자신을 온전히 희생으로 드리는 맘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짐승’ 뿐만 아니라, ‘아벨 자신’을 받으셨던 것이다.

우리는 헌금할 때에 그냥 물질을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생각을 해 봐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올 때, 그리고 헌금을 준비할 때, 이미 “나를 받으소서!”하는 맘으로 드려야 한다.

그렇게 실천하지 못했다면 이제부터는 진실하게 나아오라.

그러나, 가인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방법’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은 단순히 정성만이 아니었다.

그는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만족케 했어야 했다. 그것은 ‘피의 제사’이다.

그는 하나님의 방법을 무시하고 경솔하게 행했던 것이다. 그는 이미 인본주의의 조상이 된 셈이다.

그의 마음 어느 구석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믿음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기쁘게 열납하셨다. 그는 몸과 맘을 먼저 하나님께 드렸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짐승의 피를 흘려서 그 제물을 온전히 열납되도록 드렸다.


이렇게 되자 가인은 분노했다. 원래 옛 속담에 “똥뀐 놈이 성질낸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이것을 고사성어에서는 적반하장(賊反荷杖)[―빤―][명사] [도둑이 되레 매를 든다는 뜻으로] ‘잘못한 사람이 도리어 잘한 사람을 나무라는 경우’를 이르는 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누구한테 큰소리 치는거야?”


가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자 어떤 행동을 했는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가장 비열하고 잔인한 방법을 써서 아우를 죽여 버렸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것도 인류의 시조 아담의 가정에서 말이다. 못 볼 것을 본 것이다.

우리는 형제들의 갈등을 정당화해서는 안 되지만, 세상은 지금까지 계속 형제들끼리 싸우고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사는 인생인지도 모른다.

이조시대도 보면 형제간끼리의 싸움의 역사이기도 하다.

27명의 조선왕조 역사 속에서 큰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은 것은 단 6건 밖에 없었다. 결국 왕자들의 격투의 역사이다.


가인은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지 않으시자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5절).

하나님께서는 친히 말씀으로 타이르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왜)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 것이니라”((6,7절).

사람이 화를 이기지 못하면 ‘일(사고)’을 저지르고 만다.

하나님은 비록 죄가 너를 덮치고 싶어 해도 “너는 죄를 이겨야 한다!”는 뜻이다.

죄는 항상 우리 앞에 숨어 기다리며 언제라도 덮치려고 하는 원수이다.

우리는 죄를 이겨야 한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는 안 된다.

그러나, 주님의 보혈의 능력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가인은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그는 김일병처럼 일을 내고 말았다. 어제 매스컴에 보니까 군생활하면서 고참이 화나게 하거나 폭력을 쓸 때 복수하고 싶은 생각을 70%이상은 가져봤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화나는 대로!’살 수는 없는 것이다.


가은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는 죄를 버리지 못하는 경우에 빠지고 말았다.

그가 회개할 생각은 고사하고 그 분노대로 치닫고 말았다. 그 배후에는 ‘처음부터 살인하는 자’(요8:44)인 마귀가 조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회개했더라면 그 역시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을 것이고 이런 경우로 치닫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최초로 ‘피흘리는 자’가 되었고, 아벨은 그 피흘리는 자에게 ‘순교’를 당하고 말았다.

그라아프 박사는, “그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죽임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기도 한다.”고 했다.


가인은 이렇게 아우를 죽이고도 뻔뻔했다. 김일병(8명을 죽인)가서 태연하게 다시 보초를 섰다.

그는 감촉같이 죽여서 땅에 암매장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 광경을 누가 보셨을까요? 아담도, 하와도 그 광경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의 만행을 다 보고 계셨다.

 우리 인새들은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낯을 피해갈 수 없다!”는 진리를 알아야만 할 것이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오리이까?”(시139:7).

하나님은 가인을 부르셨다. 가슴이 철렁했을 것이다. 그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을 것이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9절).

핏소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향해 피값을 갚아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