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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후손과 가죽옷

좁은길을 걸으며 2005. 6. 23. 10:47

 

                  여자의 후손과 가죽옷            2005/06/22/수/

                         (창세기3장10-21절)               이송로목사(전주서광)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처음부터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신격을 침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인간은 그의 피조물임을 인식해야 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선생과 제자가, 상사와 부하가, 사장과 직공이 아무리 친하다고 할지라도 수하 사람의 위치에서는 상대방이 누군지는 알고 있어야 한다.

아무리 아버지하고 친하다고 해서 ‘야, 애비야....!’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했을 때 결코 그것을 묵과하시지 않으셨다. 그 인간의 범죄는 일종의 신권을 침해하려고 하는 무서운 범죄였다.

“하나님같이 되려고 하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그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최초의 언약을 어긴 당사자들은 그에 상응한 댓가를 지불받아야 했다.

그 무엇으로도 그 댓가를 치룰 수 없다. 단 하나 “죽음으로써만” 댓가를 치룰 수 있다.

  인간이 언약을 깨트린 결과는 '계약상의 형벌'대로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먹는(어기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2:17)고 했기 때문이다.


뱀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않으셨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뱀에게는 “네가 왜 이렇게 하였느냐?”고 물으시지 않으셨다. 뱀은 인간을 죄짓게 했으므로 저주를 내리셨다.

사단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원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에게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12절).

그리고 여자에게도 물으셨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13절).


그러나 그들은 모두 다른 상대방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려 했다.

책임전가로 인해 자기들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저지른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빌려고 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발뺌하려고 하고, 모면하려는 수단으로 거짓말을 둘러다 대고, 또한 사람에게 떼어 넘기려는 악한 본성이 있다.

그러기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는 바울 사도의 증언 100% 맞는 말씀이다.


우리 시조인 아담과 하와를 봐도 그렇다. 그리고 우리가 청문회를 봐도 그렇다.

광주사태를 저지른 당사자들이 청문회 자리에 나와서 “내가 발포 명령을 했다!”고 증언하는 사람을 보았는가?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그 책임을 모면하려고 하면 할수록 목은 죄어들어오고 있을 것이다.

그 양심에서는 “네가 범인이야!”라고 하면서 괴롭힐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범죄한 인간은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아주 없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18:20).

의인의 의도 악인의 악도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아간다 것이 하나님의 진리의 공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도할 때에 “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사랑하셔서”란 말로써 기도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 기도이다.

우리 이간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형벌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한 순간부터 구속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다시 말해서 ‘살려 낼 생각부터’ 하셨다.

그러니까 사단은 인간을 범죄케 하고 승리의 개가를 불렀을 것이나, 그리 좋아할 것이 못 된다.

저주받은 사단이 하나님의 피조물(만물의 영장인 인간) 가운데서 개입해서 넘어뜨리고 나면 모든 것이 자기들의 수하에 들어올 줄로 알았을 것이다.

사단은 생각하기를, “이제 이 세상은 내 손 안에 있어. 우리가 마음껏 지배하게 됐지!” 하면서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무궁함을 보라.

하나님은 범죄한 인가들에게 징계를 선언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멸망에 처하는 저주를 내리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오히려 인간들의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할 계획을 가지고 ‘여자의 후손’을 예비하셨다.

그들이 변명과 핑계로 일관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고’ 구속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셨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세상을 파괴시키려고 음모한 사단을 그대로 두시지 않을 것을 말씀하셨다.


온 세상에 미친 하나님의 진노는 ‘뱀에 대한 저주’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뱀이 배로써 기어다닐 때마다 인간의 범죄가 가져다 준 결과라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모두의 관심의 초점은 15절에 있다.

다같이 읽어보자.

이것을 ‘원시복음(Protoevangelium)’이라 부른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메시야에 대한 최초의 예언’이다.


‘여자의 후손’ 다름 아닌 사람으로 오신 그 한 분(a Man)으로 인해서 뱀의 머리를 박살을 내어버리신다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했다.

하나님은 그 한 여자를 지목하셨다.

하나님은 가브리엘 천사를 그 여자에게 보내셨다.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1:30,31).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은혜 언약’의 완성자가 되셨다.


여자의 후손은 그(사단의 세력)에 의해서 발꿈치를 상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셨다.

지금도 사단은 그리스도와 원수이다. 그리고 우리의 원수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원수에 의해서 무참히 십자가에 죽으셨다. 뱀에게 발꿈치를 물리신 것이다. 이것이 복음서의 얘기이다.

사단의 세력에 의해서 발꿈치를 물리신 것이다.

그러나 뱀의 머리는 초전박살이 났다.

발꿈치를 상한 것과 머리통이 깨져버린 것과는 극과 극의 차이다.

지금도 그들은 피를 흘린 채로 돌아다니며 그 꼬리가 살아있어서  ‘십자가의 원수’로 활동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에게 ‘길’을 내셨다. 그것은 ‘은혜의 길’이다.

인간의 타락은 무서운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능가할 힘을 갖지는 못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을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서 입혀주셨다(21절).

이것은 영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로 못입혀 주신 사건이다.

그리스도로 옷입고 사는 것이 크리스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면 완전히 흉악한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가려주셨다.


인간이 스스로 엮어 만든 무화과나무 잎(인간의 행위)으로는 그 수치를 가리을 수 없다.

햇볕만 쫙 비추면 그냥 말라버리고 그 수치가 금방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옷이라야 한다.

‘가죽옷’은 그냥 만들어진 옷이 아니다. 양이나 짐승의 피를 흘려야 만들어지는 옷이다.

예수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가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예수님의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친히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갈3:27).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에게 물으신다.

“네가 어디있느냐?”

우리는 정직하게 대답해야 한다.

“나는 지금 죄의 길에 고달파 신음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품으로 돌아갈 때에만 행복하다. 그리고 안전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의를 붙잡아야만 산다.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그 어떤 일에도 책임을 지려고 할 뿐 완전히 책임을지지 못한다.

오직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그 분을 믿고 따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