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한 가정으로
2005/06/ (에베소서 5장20-6장4절)
우리는 지난 시간 우리 각자는 성령충만한 신자가 되어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각자가 성령충만함 받는 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라면 우리 가정과 교회가 성령충만하기를 바라고 계실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한 사람이 이 자리에 모였다면 서광교회는 성령충만한 교회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최초의 교회는 그 모인 각자에게 성령이 부어짐으로써 성령충만한 교회로 출발을 했습니다. 정말 멋진 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령충만 받은 신자들이 각 가정으로 돌아가면 가정이 성령충만한 가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성령충만을 경험하고 사는데 가정적으로 성령충만한 모습을 보기란 쉽지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성령충만한 가정]이란 제목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런데 우리 가정이 성령충만한 가정이 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되는 것일까?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창조를 하시고 맨 처음 가정을 세우셨다는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가정을 세워주심으로써 그 창조 목적을 이루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자녀를 낳기 전에 이미 아담과 하와 두 사람으로써 가정은 성립된 것입니다. 따라서 자녀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남녀가 정상적으로 결혼관계에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했습니다. 그 범죄는 가정에 치명타를 날렸습니다. 오늘날 가정이 무너지는 것은 죄 때문에 무너집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를 주십니다. 바로 이 교회를 하나님나라의 새 가정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없으면 여러분의 가정도 축복받은 가정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교회와 가정을 이 둘을 다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는 것은 잘못되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이 땅에 있는 수많은 가정들이 균열이 가 있거나 무너져내리고 있습니다. 이미 무너진 가정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안에서, 교회를 통해서 가정은 얼마든지 회복될 수 있습니다. 아니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 즉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포함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에베소서의 구조를 잘 보아야 합니다. 에베소서의 구조를 보면 큰 틀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 아들의 피로 세우신 새로운 사회로서의 교회를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3). 그렇다고 한다면 교회는 우리가 영적으로 태어난 모태와도 같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신자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가정입니다. 교회는 여러분들을 낳아준 어머니와도 같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신앙을 양육해 주는 가정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멀리하는 사람들은 그 신앙이 형편없습니다. 그는 사회생활도 가정생활도 건강하게 되지를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문제는 교회를 멀리하는 것이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정말 생각이 바른 사람이라면 그릇된 인생길에서 다시 교회중심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축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에베소서를 읽어내려다가 보면 “아, 바로 이거야!”라고 감탄을 하고도 남을 만큼 바른 인생 삶의 방향을 바르게 제시해 주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려면 교회를 소중히 여기라는 것이고, 또한 교회를 통해서 진리의 가르침을 받아서 빛의 열매를 맺고 지혜로운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것이 원활하게 되어지려면 우리 자신의 결단과 의지로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충만한 삶은 일차적으로는 ‘올바른 예배생활’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배생활이라는 것을 알고 보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일과 예배를 소중히 여기지 못한 사람은 성령충만과는 사실상 거리가 멉니다. 다음은 인간관계의 회복입니다. 엡5:21을 보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바로 인간관계의 회복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확인하는 가늠자는 이 양대축(수직, 수평)이 바르게 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 중심은 인간관계의 수직축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한 가족인 교회의 구성인들로서 ‘피차 복종’이 이뤄져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섬기려고 하는 맘만 있다면 그 교회는 행복한 교회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관계의 축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은 역시 가정이고, 그 가정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부부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그것을 잘 보았습니다. 바울은 먼저 “아내들이여!”(22절)이라고 권면을 합니다. 그리고 “남편들아!”(25절)하고 그 다음 순서에 두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바울이 ‘여성상위시대’를 말하려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아니 반대로 ‘남존여비’의 사상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남존여비’라는 말과 ‘여성상위시대’라는 말을 운운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여는 어디까지나 평등입니다. 그러나 여성들에게 먼저 권면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내신 질서상 여성의 머리가 남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질서상의 문제이지 결코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함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22절). 여기서 보는 바는 남편을 “그리스도처럼 떠받들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맘속에 거북이가(거부반응) 왔다 갔다 합니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아도나이)’라는 말에 주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주종관계’ 속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인이 상전을 떠받들 듯이 남편을 떠받들라는 것입니다. 많이 여성들은 억울한 생각을 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내들이 남편을 ‘주(主)’처럼, 또는 ‘왕’처럼 떠받들 때 자신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행복하고 화목하며 밝은 성경적 가정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가정의 질서를 잘 지켜가야 합니다. (1)아내들은 먼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당신 말이 옳아요!”라고 하고 일단 따라줄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여성들이 자기 주장을 앞세우다가 남편의 비위를 거스리고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가는 경우를 봅니다. (2)자녀들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의 질서가 바르게 섭니다. 자녀들 보는 앞에서 남편의 잘잘못을 따지거나 책하지 마십시오. 지혜로운 여성은 자녀들 앞에서 남편의 권위를 세워주는 것입니다. (3)서로 존경하되 남편의 위치를 존중해 주십시오.
남자들은 아내인 여성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가장 괴로워 니다. 밖에서는 호인이요,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도 아내에게만은 존중히 여김을 받기를 원합니다. 아내에게 무시당하는 남자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무시당하며 살려고 저 여자랑 결혼했던가!”하고 자신을 비관하기까지 합니다. 세상은 거꾸로 되어 가는 느낌을 받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갈 때에 결국 그 가정은 튼튼한 가정,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줄 아는 여성이 성령충만한 아내입니다. 다음은, 남편들이 아내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25절). 부부 문제를 언급할 때에도 꼭 빠지지 않는 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모든 모는 문제들의 해답입니다. 예수님은 결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이시기에 우리 인간들처럼 결혼의 필요를 느끼신 분이 아니십니다. 다만 그분은 결혼하지 않으셨어도 영적으로 볼 때, “나와 결혼하신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랑, 우리는 그분의 신부입니다. 그러니 지금도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나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우리의 결혼생활, 또는 가정생활을 바르게 이해시켜주시는 모델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하여 희생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다고 말씀합니까? ‘사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그것은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냥 죽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 때문에 죽었다!” 우리는 ‘위하여(for)’라는 말씀에 관심을 가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어에서 전치사로 쓰이는 용어이지만 이 전치사 다음에는 반드시 명사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명사는 ‘her’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녀를 위하여(for her)’라는 말이 됩니다. 남자들은 일단 결혼했으면 딴 데 눈을 돌리지 말고 ‘그녀(아내)를 위하여’ 목숨 걸고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왜 우리 사회가 이렇게 변질 되었고, 타락했습니까? 그것은 교회를 무너뜨리고 가정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사단의 공격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은 마귀도 수법이 다양해서 게릴라 전술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 가정들은 다시 회복을 받아야 합니다. 얼마든지 예수 안에서는 회복잗을 수 있습니다. 다시 신혼 때 기분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바로 성령충만한 삶을 회복할 때 가능합니다. 성령충만한 가정이 늘어가면 사광교회는 저절로 성령충만한 교회가 됩니다. 성령충만한 가정을 이루려면 남편과 자녀를 교회로 인도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만 성령충만하고 집에 가면 지옥으로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늘부터 우리의 태도를 바꿉시다. 가정에서 온 가족이 함께 드리는 예배가 회복되기를 기도하십시오. 목사는 이제부터 여러분의 가정이 성령충만한 가정이 되기를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