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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ont color="#B0008F"><font size="2">성령충만</b></font></font>

좁은길을 걸으며 2005. 5. 15. 13:50

                                                                      성령충만                                          2005/05/15/성령강림절

 

                               성경: 사도행전2장1-13절

 

오늘은 역사적으로 매우 뜻깊은 날입니다. 구약에서는 오늘이 오순절(五旬節;Pentecost)로 지켜져왔습니다. 또한 이 날을 맥추절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이 날부터 보리를 베기 시작하는데 그 첫 곡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약에 와서 성령감림절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승천하시던 날부터 120명의 성도들이 예수님의 명령대로 한 곳(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를 했는데 열흘째 되던 날, 곧 오순절 날에 그 모인 곳에 성령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이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절기가 된 것은 성령이 임하므로 오늘의 신약교회가 태동을 했고, 또한 세계 선교의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나타난 것은 갑자기 되어진 사건이 아니고 구약 성경에서 내내 예견되어진 사건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을 사도행전 2장16-21절까지의 말씀에서 선지자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이라고 설교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부터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14“16)라고 말씀하신 바 있으며, 그리고 승천하시기 직전에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니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5)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사건이 성령 강림의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때의 상황과 배경을 잘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오순절이 되어 그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나더니, 사람들이 앉아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혀처럼 생긴 불꽃이 나타나더니 그것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각 사람위에 와 닿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그들도 알지 못하는 외국어로 말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때마침 오순절 절기를 지키려고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도 생전 처음 보는 일인지라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날에 이런 사건이 일어난 것도 하나님의 큰 뜻이 있었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은 가장 놀란 것은 외국어(방언)로 말하는 것을 보고 더욱 더 놀랬습니다. 그런데 더욱 더 희한한 것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자국어로 알아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난 곳 방언’(8절)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놀라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7,8절). 그 때 거기 외국에서 온 사람들의 나라는 열다섯 개국이나 되었습니다. 그 모인 무리들이 말한 대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하나님의 큰 일(the mighty deeds of God’(11절)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신 사건은 ‘또 하나의 새 시대를 여는 역사적 큰 사건’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의미를 제대로 안다면 어찌 감히 개천절이나 광복절, 석가탄신일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성령강림 사건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놓은 구원을 각 사람들 속에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심으로써 새롭게 적용하시는 놀라운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성령강림절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 믿고 새사람으로 거듭날 수도 없고 마치 접붙인 포도나무에 수액이 흐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 같이 우리의 영혼도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성령께서는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더욱 끈끈하게 만들어주는 새로운 능력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크리스챤이라고 말할 때 우리 모두는 ‘성령받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냉정하게 말씀드려서 크리스챤이 아닙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오늘 성령강림절에는 무엇보다도 “다 성령의 충만의 충만함을 받고”라는 말씀을 토대로 [성령 충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절에는 거기 모인 120명의 성도 모두가 성령충만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우리 성들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령충만의 사건이 그때에만 주어진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성령충만한 가운데서 예배를 드린다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겠습니까? 이번 성령강림절을 맞이해서 다시 한 번 성령충만의 놀라운 역사가 여러분 각 심령 속에 나타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것’, ‘성령세례’, 그리고 ‘성령충만’에 대해서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너무나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는 것은 일평생의 신앙 가운데서 단 한 번 받습니다. 그 성령은 다시는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 우리는 ‘거듭남(중생)’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순간 동시에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세례는 일치한 맥락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우리가 성령을 처음 받을 때 경험할 수 있기도 하지만 그 이후로 수시로 반복해서 아니면 연속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고 성령충만의 경험을 했어도 얼마든지 성령충만에서 멀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보면 120명의 성도들이 경험한 바는, 성령을 받음과 동시에 성령세례를 받은 것은 물론 또 성령충만과 능력충만을 동시에 경험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따라서 성령충만한 베드로는 능력있게 입을 열어 설교할 수 있었고 나아가서 제자들은 죽음도 두려움 없이 능력있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아주 능동적으로 내 것 네 것이 없이 먹을 것과 쓸 것을 함께 나누는 코이노니아(영적교제)의 경험과 백성들에게도 칭송을 받는 자리에까지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성령충만 받으면 좋은 줄 알지만 사람들은 성령충만 받기 위해서 아무런 노력도 가하지 않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는 것은 우리가 성령충만한 생활을 못 하게 되면 세상과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질질 끌려다니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면 신앙생활을 해도 즐거움이 없고 무능력한 신자로 전락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얼마든지 방탕한 생활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충만을 사모할 뿐만 아니라 성령충만 받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음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결코 성령충만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무지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는 죄’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야 합니다. 찰스 피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이 죄인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는 것도 죄다. 그리스도인은 더 많은 빛을 소유했으므로 죄인이 회개 안하는 죄보다 성령 충만하지 않는 죄가 더욱 크다.” 앤드류 머레이는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성령충만을 받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이나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고 일하기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온 마음을 다하여 성령충만을 구해야 한다.” 옳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씀드려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충만을 받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요, 신앙 생활에서도 큰 유익을 줄 뿐 아니라 사명을 감당하는데 커다란 유익을 줍니다.

 

오순절 계열, 곧 순복음파의 사람들은 성령충만을 성령세례와 동일시하고 성령의 체험적인 면을 극단적으로 강조하여 체험을 말씀보다 중시하고 능력과 은사를 성령충만한 삶과 동일시함으로 성령충만한 삶에 대한 이해에 많은 오류를 가져왔습니다. 무조건 방방뛰면서 방언받게 하는 것, 병고침 받는 것이나 은사일변도로 가는 것은 잘못된 신앙으로 치닫는 함정이기도 합니다. 역사상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운동 중의 하나가 사이비 성령운동입니다. 이런 일들 때문에 ‘성령’이란 말만 나와도 회의를 자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 또한 마귀가 우리 앞에 파놓은 무서운 함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강조되어야 할 부분은 성령충만입니다. 항상 진짜 주변에는 가짜가 들끓기 마련입니다. 유사품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충만을 컵에 물을 부어 넘치는 것에 비유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인격적인 성령께서 우리의 지정의(인격)를 온전히 점유하고 지배하는 상태를 가리켜 성령충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삶은 그리스도인에게 능력과 생기와 기쁨, 성결이 넘치는 삶을 제공합니다. 그래서 생활의 변화가 따르고 매사가 긍정적인 삶의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에스겔의 말씀은 바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에스겔은 환상 가운데서 성문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물이 처음에는 발목에 찼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은 물이 무릎에 차오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허리에 차올랐습니다. 여기까지를 충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또 그 다음에는 건너지 못할 강이되었습니다. 곧 이것을 충만이라고 합니다. 헤엄 못치는 사람은 물의 지배를 당하면 죽습니다. 우리는 내 맘대로 날뛰는 신앙이 아니라 나의 옛사람은 온전히 죽고 이제 성령께 지배를 당하는 신앙일 때 성령충만한 성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의 지배를 당해야지 내가 성령을 지배하려고 하는 사람은 결코 성령충만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성령충만은 누구나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무지하면 성령충만 받는 일에 나타나는 장애물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리고 교만한 마음과 자만심이 들끓고 있는 사람에게는 성령충만이란 사실상 어렵습니다. 나아가서 회개하지 않는 마음과 세상 쾌락적인 것들로 가득 찬 마음은 성령충만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말씀생활과 기도생활이 없는 자에게는 성령충만이라는 체험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죄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충만 달라고 기도합시다. 기도 가운데서 온전히 나 자신을 하나님께 맡깁시다. 그러면 어느 새 성령께서는 내 안에 인격적으로 역사하셔서 나를 온전히 사로잡아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할 때에 어쩌면 성령충만 받을 때까지 그 자리에서 일어서지 말고 간절히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의 기도가 기도다워지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부터는 더욱 더 성령충만한 생활을 이어가기를 힘쓰십시오. 신기하게도 성령충만하면 내가 육신으로 노력할 때보다는 모든 일에 큰 능력의 역사가 따르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하면 죄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고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공부하는 학생이 성령충만하면 지혜와 지식이 남달리 뛰어나게 될 것입니다. 근로자일 경우에 역시 남달리 일의 능률과 성과를 거두게 되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장사를 하는 경우에 생각지도 않게 많은 손님과 이웃들을 만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운동 선수에게는 상상을 초월한 기량과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전도자에게는 ‘예수 천당’ 한 마디에도 회개하고 돌아오는 기적을 맛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부터 성령충만 받기를 기도하십시오. 거룩하신 성령께서는 여러분들의 일생을 가장 아름다운 복된 자리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매일 성령 충만을 구하십시오. 지금도 우리 주님은 여러분에게 성령충만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태도입니다. 성령충만을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성령충만이 임할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갈급한 마음으로 부르짖는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