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새만금 방조제 개통식 행사 장소랍니다. 다녀왔네요.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기를
성경/갈라디아서2장1-10절 2010.5.2.2주일. 이송로목사
바울은 그냥 사도(an apostle)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우신 사도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다른 제자들처럼 따라다닌 일이 없으나, 그에게 그리스도께서 직접 만나주셨고, 또한 직접 계시로써 복음 전반을 바르게 이해하고 깨닫도록 하셨다.
그러니까 바울이 가지고 있는 해박한 구약의 지식을 토대로 해서 신약의 계시, 즉 신약 27권을 기록했다.
이런 바울에게서 듣고 배운 교회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고린도교회, 데살로니가교회, 빌립보교회, 에베소교회 등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그들은 바울의 소중함을 잘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바울이 그곳을 떠난 후에 그들을 휴혹하는 이단들의 세력이 침투해 들어왔던 것이다.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고 했다.
이 사실을 안 바울은 정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껏 가르쳐놓으니까 엉뚱한 자들이 들어와서 교회를 어지럽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 까닭에 그는 갈라디아서를 쓰게 되었다. 그는 “다른 복음은 없다!”고 하면서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1:8).
그러면서 자신이 전한 그 복음은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1:12)고 했던 것이다.
그는 지난 날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체험도 있지만, 아라비아로 가서 3년 동안 그리스도와 교통하면서 신약의 계시를 받았다. 그것이 그가 다니는 곳(선교활동)에서의 복음전파사역이었으며, 나아가서 신약 성경을 기록하게 되는 근간이 되었던 것이다.
얼마나 훌륭한 사도인가?
그래서 예수와 비할 바는 아니지만, ‘예수와 바울’이라는 논문과 책을 쓴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바울은 그 이후 세 번째 예루살렘 방문을 하게 된다. 어느새 14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주님이 올라가라”고 하신 계시를 따라 올라갔다고 말한다. 그래서 거기 있는 사도들이나 복음의 지도자들 앞에서 자신이 전한 복음을 검증할 뿐만 아니라,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확실하게 정립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그 제시는 정말 중요했다. 그들이 전한 복음과 자신이 전한 복음이 서로 짝을 이루고 합치해야만 되는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이 지금까지 이방 땅에서 전한 복음에 큰 훼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 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2절)
바울은 자신이 열심히 복음을 전해 왔던 과정을 하나의 ‘달음질’에 이유하고 있다. 만일 그가 참된 예수의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헛 수고’일 뿐만 아니라, ‘규칙 위반’과 같은 실격처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양심에서부터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측면들이 부족하다. 하지만 복음 진리를 믿는 것과 전하는 일에 있어서만은 명확한 지식과 전달체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오늘 날 목사들이 그러해야 한다.
바울은 3절에서부터 할례 문제를 꺼집어 내서 신랄하게 다룬다. 그것은 갈라디아교회가 ‘할례교리’로 유혹을 받았기 때문이다.
할례란 무엇인가? 그러나 신약에 와서 할례의 효능은 무엇인가? 꼭 할례는 받아야 하는가?
이런 문제를 두고 우리는 복음적으로 잘 이해를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복음을 이미 깨닫고 아는 것 같았으나 율법주의자들이 와서 미혹하자 금방 그들의 말에 휩쓸려버리고 말았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복음의 기쁨’은 싹 달아나버리고, 어느 새 ‘율법의 멍에’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정확하게 지적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4절).
그렇게 되게 한 원인 제공자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밝혔다.
그들의 수법은 간단한다.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라!”(4절).
오늘날 복음을 믿는다는 명목하에서 ‘율법의 종’, 또는 ‘목사의 종’으로 하수인노릇하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마치 목사의 말이 교황이나 교주의 말처럼 되어버려서 잘못된 것을 가르쳐도 맹목적으로 ‘아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아멘을 크게 할수록 좋은 교회같으나 자세히 보면 '맹종'하는 자들이 많을수록 아멘 소리가 큰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나는 이런 교회들을 보면서 정말 한심하고 스글프기까지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우리는 착실히 복음을 믿지 않고 율법주의나 신비주의나 이단을 좇아가면 코가 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많은 목사들이 ‘제자훈련’ 명목으로 예수제자훈련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꼬봉노릇하게 만드는 목사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국교회의 일부는 지금 타락의 일변도를 가고 있다. 복음이 아닌 것을 복음인 것처럼 하며 ‘일천번제 헌금’까지 만들어서 돈을 바치게 만든다.
정신 나간 목사들 밑에서 신앙생활 하는 자들의 현실이 정말 안타깝다.
바울은 지난 날 헬라인 디도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 억지로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꺼냈다(3절).
그 이유는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는 것임을 보여준고 있다(행15:7-11).
그렇다면 할례를 꼭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이 생긴다. 그런데 만일 할례를 강요한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바울은 이런 자들에게 잠시라도 마음을 주어서도 빼앗겨서도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했으니”(5절).
바로 이거다. 우리는 이단 집회에 가서 한 순간이라도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된다. 내가 20년 전에 어떤 권사라는 분이 나를 만나자고 하더니 자기가 잘 아는 목사님이 집회를 하니까 가보자고 했다.
어느 빌딩의 한 홀로 들어섰는데 눈치를 보니까 ‘새일교(이뢰자)’ 사람들의 집회인 것을 알아차리고 한 순간도 마음을 주지 않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이는 복음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5절).
복음 진리가 희석 된 곳에서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모른다. 가령 개혁교회 신자가 천주교의 사제 밑에서 신앙생활 할 수 있는가? ‘사제(제사장)’라는 직책과 용어가 오늘날도 쓰이고 있다는 자체가 비복음적인 것이다.
그리고 거기다가 ‘성모 마리아’가 언급되는 것과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것을 보면 용납이 되겠느냐는 말이다.
복음 진리가 항상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아야 하고 복음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로서 얼마나 거리낌이 되겠는가?
우리는 그 어떤 신비주의도, 율법주의도, 다원주의도, 기복주의도, 은사주의도, 금욕주의도 반대한다. 우리는 오직 복음주의만을 따라갈 뿐이다.
여기에 참된 자유와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만이 우리에게 영생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바울은 유력한 인사들을 만났다. 그렇다고 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험증할 수 있는 자격자란 뜻도 아니다.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로부터 험증된 복음을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금은 어디가나 금이다. 땅 속에 묻어놔도 금이고 시궁창 속에 박혀 있어도 금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전한 복음은 그 유력자들이 흠정하기 전에도 금이고 흠정한 후에도 금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다만 서로가 참된 복음의 증인이요, 사도라는 점에서 서로의 만남은 의미가 있었다.
보나마나 그들은 서로 마음이 통했을 것이다. 그렇다. 참된 복음을 전하는 목사끼리는 어디가나 친구이며 또 친구가 되고 싶다. 나는 정치꾼 목사를 안 좋아한다. 그러나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 목사를 보면 그냥 마음을 주고 싶고 말 몇 마디만 나눠도 맘이 통해버린다.
바울도 그것을 느꼈던 것으로 보여진다.
7-8절이 그것을 보여준다.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함을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꼭 사람에게 검증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유력자들 앞에서 자신이 믿고 전한 복음을 뚜껑을 열어서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합치했고 100% 일치된 복음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서로는 마음을 주고받을 만큼 가까워지고 말았다.
9-10절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교제의 악수’가 보여주는 바는 대단한 것이었다.
이런 관계 속에서 서로는 하나임을 확인할 수 있었고, 할례가 없어도 구원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교제의 악수(the right hand of fellowship)'라는 말 속에서 보여주는 바는 그들은 서로 마음이 통하고 영적으로, 복음적으로 하나임을 입증한 결과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14년을 서로 떨어져서 사역해왔지만 사역지만 다를 뿐 전하는 복음의 내용은 같았음을 확인하면서 교제의 악수를 나누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누가 뭐래도 바울의 수고는 헛되지 아니했다. 바울이라고 해서 흠과 티가 없는 완전한 인간이겠는가? 그렇지만 그가 전하는 복음에 있어서만은 후회할 것이 없었다.
오늘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지난 날 20년 이상 농촌과 도시, 그리고 해외에서 복음 전한 것에 대해서는 후회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무던히 애를 써 왔기 때문이다.
여러분들도 바른 복음을 듣는 것과 따라가는 것에 생명을 걸어야 한다. 아무리 프로그램이 뛰어나고 웅장한 예배당 건물과 교인 수, 멋진 찬양대원들이 많아도 올바른 복음선포가 결어되어 있다면 여러분의 신앙은 바를 수가 없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에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은 올바른 복음의 신앙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