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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하는 복음

좁은길을 걸으며 2010. 4. 28. 10:40

 

미얀마의 지프니네요 잘 굴러가고 그래도 여유롭네요. 이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고급 리무진이 아니라 복음이다.

 

내가 전하는 복음

성경/갈1:11-24.                                    2010/4/25/주일.                         이송로목사

 

울은 갈라디아교회 안에 침투한 거짓선생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전에 전한 복음과는 내용이 달랐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단사상이다.

복음은 오늘 여기에 바울이 와서 전하거나 아니면 요한이 와서 전하거나 현재의 아무개 목사가 와서 전하거나 그 본질에 있어서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어떤 율법적인 행위의 완전성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복음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 역시 복음을 혼탁케 하는 자들이 참으로 많다. 기독교 T. V에 출현해서 설교하는 목사들 가운데서도 엉터리들이 너무나 많다.

그럴 때마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독초를 먹을까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 검증되지 못한 사람들이 유명세를 타려고 돈까지 헌납능 하고 출현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

 

 

1. 성경에 나타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오늘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어떻게 해서 전하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면서 결국 자신이 전한 복음을 검증까지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께, 그리고 사도들에게 검증된 복음을 전하였던 것이다.

11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바울은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살아왔다. 그 중에 하나가 갈라디아교회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지역에 들어가서 순수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그 결실로써 갈라디아교회가 설립이 되었다.

그 복음을 전할 때 사람의 생각대로 전하는 복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을 꿰맞춰서 전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12절,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우리는 이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그의 계시’라는 말이다.

복음은 오늘 날 구약과 신약에서 계시된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바로 그분의 사역과 교훈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바로 바울 자신이 그러했다. 바울은 오늘날 일반적인 목사들과 달라서 그는 예수를 직접 만난 사람이며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신약 성경’의 절반이나 되는 분량의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은 직접계시가 종결되었으므로 우리는 이미 완성된 구원계시인 성경을 토대로 해서 거기에세 인출된 말씀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복음을 바르게 제시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도 바울처럼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이단이며 엉터리인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내용’은 사도 요한이 기록한 요한계시록까지, 즉 성경 66권으로 충족된 계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늘날도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단이거나 신흥종교의 교주들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8절)라고 했던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 목사들의 모든 설교는 성경 66권에 전해진 복음을 말하는 것이 바로된 설교인 것이다. 66권 계시의 말씀에 근거도 없는 것을 가르치거나 그 어떤 것을 강요하는 경우에 성도들은 잘못된 신앙으로 전락되는 것이다.

 

 

2. 이단사설에는 구원이 없다

 

바울은 유대교에 심취해 있었다. 그러나 그 종교의 신앙은 커다란 허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고 율법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쏟아왔다.

그런데 바울의 더 큰 맹점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도 구원을 얻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들을 핍박하고 교회를 박멸하려고 했다.

13,14절,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으나”

사실은 바울은 유대교에 심취해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구원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오히려 이단시하고 예수교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이려고 다녔다. 그는 그 열심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 줄 알았다. 빈껍데기만 있는 종교에 충성하고 있었던 어리석음을 훗날에 ‘모르고 그랬다’고 시인했다(딤전1:13).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 그가 유대교인이었기 전에 ‘예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부르신 이가.....”(15절).

그렇게 된 것은 바울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이기에 오늘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인류는 한 하나님에게서 나왔으며 그분만이 참 신이시며, 그분만이 구원자가 되신다. 그분이 만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게 하셨다.

그리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그리고 승천하셨다. 지금은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다. 그분이 심판자로서 인류의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렇게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다.

 

 

3. 기독교 복음에만 구원이 있다.

 

바울은 자신이 율법적인 의로 구원을 얻을 줄 알고 그것을 지키는 것에 열정을 쏟았다.

그리고 나와 같이 살지 않는 자를 정죄했다.

그런데 나중에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어머니 태로부터 택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사도가 되어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복음주의자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럴 때 자신은 일단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는 것이다.

 

16,17절, “그의 아들을....”

그는 3년 동안의 아라비아 광야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복음 전반의 지식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아들의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있다는 것을 그는 전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면 기분 나뻐라 하고 빈정된다.

하지만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행4:12).

이것이 진리인 것은 우리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기 행실’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요새 법정 스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자유이겠지만 그 사람도 (100% 완전하지 못한)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이다.

사람들에게 인기 좋은 것과는 무관한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며 그리스도의 구원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은 인간의 판단에 의해서 결정되어질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인 성경 진리대로 되어지는 세상이라는 점에서 두 말 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바울도 그리스도를 만나고서 ‘자기의’, 즉 ‘자기 행위’로 구원받지 못할 인간임을 철저히 깨닫고 복음을 믿는 것, 즉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강렬하게 시사하며 가르쳤던 것이다.

그는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착실하게 준비했다. 그것은 ‘아라비아 생활’이었다. 아마 그는 그리스도와 더 깊은 만남을 위하여 그 기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4. 그는 검증을 받았다.

 

18-24절,

우리는 오늘날도 검증된 기관이 필요하기 때문에 신학을 하고 목사안수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런데 바르게 검증도 안 하고 목사 안수를 남발하는 한국교회를 볼 때 마음이 아프다. 그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복음과는 상관이 없는 빗나간 복음에 목을 매는....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복음을 믿었으면 오직 ‘참된 복음의 내용’을 가지고 전해야 한다.

그러나 복음이 아닌 것을 가지고 복음인 것처럼 전한다면 그것은 ‘사기꾼’이나 다를 바 없다.

 

바울은 아라비아 3년이 신학교 시절이나 마찬가지로 보냈다. 그는 구약 성경을 그리스도와 연결시킬 수 있었다.

그는 율법이라는 것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갈3:24).

이 과정을 마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바울은 사도들을 만나고자 했으나,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만나지를 못했다(19절).

주의 형제 야고보는 12사도 중의 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다른 사도들 못지 않게 권위를 인정받는 자였을 것이다. 그는 나중에 야고보서를 기록하는 은총을 입은 사람이었다.

버울은 다른 사도들과는 접촉을 못 하게 되고 야고보를 만나 보름 동안 자신이 가진 복음진리를 충실히 나누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그후에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러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그때에 유대의 교회들이 바울 일행을 가리켜서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전한다’”라고 했다. 이것은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참된 복음의 사도가 되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결과이다. 바울은 수리아, 길리기아 사람들에게까지 인정을 받았다.

이 사실을 통해서, 즉 “바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24절).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렇게 전 세계 어디로 가든지 참된 복음의 증거자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검증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