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꽃피는 4월월인데 눈이 오다
화를 자초한 사람 웃사
성경/역대상13장1-14절 2010년4월 14일 이송로목사
우리는 살다가 보면 뜻하지 않은 불상사를 겪을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도 알고 보면 우리의 부주의가 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때가 많다.
삼풍아파트가 무너진 것과 성수대교가 가라앉았을 때 이것을 일컬어 단순히 천재였느냐 인재였느냐? 그러나 이것은 인재였다. 부실공사가 주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이고, 정직했더라면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하고 반성을 한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룰(rule)을 지켰더라면 그런 사고가 안 났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사전에 예방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법을 무시하고 사고가 난 경우에 그 모든 책임을 그 공사를 맡은 사주나 공원이 져야 한다.
1999년 씨랜드 어린이집 화재 사건으로 19명의 어린이가 불에 타서 죽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낡은 시설일수록 리베이트가 더 많아서 그것을 타 먹기 위해서 낡은 2층 건물을 그대로 방치했다는 것이다. 2009년의 맥시코 어린이집 화재 사건으로 40명의 어린이가 죽었다. 142명의 어린이가 잠자고 있었는데 화재시에 담벽이 너무 높아서 구조에 있어서 장애가 컸다는 것이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얘기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다.
1. 목적이 선하면 과정도 선해야 한다.
다윗이 그동안 하나님의 궤가 방치된 것을 알고 굉장히 마음 아파했다.
그래서 왕위에 오르자마자 궤를 옮겨오는 것부터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사실 하나님의 궤는 엘리 제사장 때에 불레셋에게 빼앗겼다. 불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다곤 신전에 모셔 두었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옮겨 놓고 그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여 20년간 법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던 것이다(삼상7:1-2).
사실 하나님의 궤는 항상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모셔두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잘 보관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궤앞에서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섬겼어야 한다.
그러나 엘리 때에 그것을 하나의 미신적인 도구로 여기다가 빼앗겨버리는 망신을 한 것이다.
이 소식 때문에 놀라서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서 자빠져 목이 부러져서 죽었다.
얼마나 큰 충격이며 불상사였던가?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빼앗겼던 법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 일을 시도한 장면이 나온다. 이건 매우 잘 한 일이고 아름다운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춤추며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했다.
그런데 이런 좋은 취지를 가지고 한 일에도 큰 불상사를 만나게 된 장면을 보게 된다.
궤를 실은 수레가 뛰기 시작하니까 법궤가 땅에 떨어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래서 워낙 상황이 급한지라 웃사가 그것을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붙잡았다가 즉사를 했다는 얘기다. 한 순간에 분위기는 싸늘하게 바뀌고 말았다.
목적이 선하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매우 큰 화를 불러올 수도 있다. 우리 기독교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한다”는 공산주의 이론을 반대한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도 아니다.
목적이 선하면 과정도 좋아야 하고 끝도 아름다워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사회에서 이런 것을 무시하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보아오며 살아왔다. 하나님의 교회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2. 법을 어기면 재앙을 만난다
웃사가 괜히 죽은 것이 아니다. 그가 죽은 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단순히 도덕법을 어겼다는 것이 아니다.
벱궤를 다룰 때는 반드시 레위지파의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었어야 한다(출25:13,14참조). 길이 멀고 험할지라도 인간의 생각으로 적당히 처리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수레에 실고 소를 끌었다. 그러다가 소들이 뛰니까 그것을 붙잡았다가 하나님이 치시므로 즉사했던 것이다.
웃사가 한 행위는 하나님의 신성을 범한 죄에 해당한다. 이것은 곧 복음과 관련한 십자가의 도를 거스린 죄와도 같다.
보통 우리가 생각할 때는 “하나님이 너무 하셨다!(잔인한 하나님?)”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결코 그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시범케이스로 죽였다고 말하지 모르지만, 그것을 훨씬 뛰어넘어 하나님의 .... 하나님의 말씀은 준엄하다. “하나님의 성물인 궤를 만질 수 없으며 만지면 죽을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민수기 4:15)
오늘날 많은 목사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바르게 가르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화를 자초하는 일인지 아는가?
단순히 도덕적인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죄와 같은 것이다.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헌금문제, 절기문제, 행사까지도 복음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인본주의 신앙으로 치닫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목회로 전락하여 버린다.
어느 날 바울은 많은 사람 앞에서 베드로에게 면박을 주었다. 그것은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는 것”(갈2:14) 때문이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앉아서 먹고 있다가 유대인들이 오니까 그것이 두려워서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나가버렸다. 이것은 복음주의자로서 취할 행동이 아니었다. 베드로는 이것을 ‘외식’하는 베드로라고 꼬집었다. 그것이 미칠 파장은 알고 보면, 복음의 근간을 흔드는 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매섭게 면박을 준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인본주의나 율법주의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보면 그것을 “몰라서 그랬습니다!”라고 했다고 해서 그냥 묵인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사는 복음주의 신학을 똑바로 배워야 한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목사들이 신비주의, 인본주의, 자유주의, 율법주의, 그리고 다원주의에 빠져있는지 모른다.
웃사가 몰라서 그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핑계의 구실밖에는 안 된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을 알되 힘써 알아야 한다!”
무지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묵인해 주시는 경우에 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 이것은 신자들의 기본인식이어야 한다. 사울은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 하는데 사람이 두려워서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제사행위를 자신이 했다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삼상15:22이 그래서 나온 것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까지 한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이 좋은 말씀도 목사님들이 신자들에게 복음의 순종이 아닌 부당한 강요를 할 때마구잡이로 써 먹는 구절이라면 비상(砒霜)일 수 있는 것이다.
3. 법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
바로 그리스도를 모셔들이는 일이 되는 것이다. 다윗은 웃사가 죽었을 때 얼마나 당혹스러워하고 은근히 화가 치솟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베레스 웃사’라고 했다.
이 때 다윗은 잠시 궤 옮기는 것을 중단하고 그 궤를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모셔두게 된다.
그런데 오벧에돔의 집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오벧에돔의 집이 몇 달 사이에 크게 복을 받게 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가 하나님께 순종했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의 법궤를 모신다고 하는 것 자체는 큰 영광이다. 그러지만 방금 전 무서운 재앙을 만난 것을 알고도 거기에 순종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는 순종했다.
순종에는 항상 하나님의 은총이 따른다.
우리는 늦지 않다. 하나님께 순종하자. 특히 복음을 순종하다. “예수 따라가며 북음 순종하면 우리 행할 길 환하겠네....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알면서도 방심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율법적인 순종이 아니라, 복음적인 순종을 드리자.
그 소문이 석 달만에 온 이스라엘에 퍼졌다. 아름다운 소문이 있는 교회로 가야 한다. 복음적인 교회로 갈 때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늘의 상을 받기 위해서는 법대로 경기해야 한다. 법을 어기면 메달을 땄어도 무효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벤 존슨이 100m 달리기에서 우승을 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약물을 복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는 메달이 취소되고, 2등 했던 칼 루이스가 1인자로 바뀌면서 큰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딤후2:5)
목적이 선하다고 과정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법을 지켜야 한다. 복음이 말하는 진리를 사수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