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경제관(經濟觀)
성경은 경제를 가르치는 경제 이론이나 교과서는 아니다. 그러나 경제는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칼빈주의의 근본사상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인간의 모든 삶의 원리요 표준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주의 경제관은 그것이 곧 성경적 경제관이다. 그런데 독일의 경제학자인 웨버(Marx Weber)는 자본주의이 기원은 기독교 정신, 곧 칼빈주의의 산물이라고 주장하였다.
▲ 경제의 이념
1) 인간은 무한한 옥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욕구를 그대로 충족 시킬 수는 없다. 인간이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는 객체(客體)의 분량은 인간의 욕구와의 관계에 있어서 항상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이 상대적 희소성 (相對的稀少性) 즉 인간의 욕구충족 대상의 희소성을 인간은 극복하여야 하며, 인간은 무한히 변화하는 욕구를 되도록 지속적으로 충족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충족에 있어서는 평화적으로 행사하여야 하며, 전쟁. 약탈. 폭력 등에 의해서는 안 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은 수단의 상대적 희소성, 평화적인 행사와 두 가지 요헌이 경제생활의 기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수단의 희소성을 극복하기 위하여서는 많은 물자가 필요하게 된다.
이에 인간은 노동(勞動)을 통하여 자연에 작용하면서 자연에서 물자를 얻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으로 인간은 자연과 밀접한 상호교섭(相互交涉)을 하는 것이다.
2) 그런데 인간은 고립하여 물자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일정한 사회관계 안에 들어가서 물자를 얻는다. 그러기 때문에 경제 생활은 인간과 자연의 상호관계인 동시에 인간 상호간의 사회관계(社會關係)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제생활은 사회적. 역사적인 성격을 갖이게 되며 따라서 역사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생활은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생존하기 위하여 많은 물자. 재화를 필요로 하는데 이� 농업. 어업. 광업 등을 통하여 얻는다. 농. 어. 광을 통하여 얻은 물자는 공업을 통하여 담당하는 것이 상업 유통과정이다. 이와같이 물자의 생산. 유통. 분배의 과정을 밟으면서 우리의 생활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경제 실태이다.
3) 따라서 생산과 분배와 소비의 복합적인 관계에 경제적 깊은 의의가 있다. 다시 말하면 경제의 개념은 생산을 노동. 노동의 결과로 얻어진 생산. 분배. 교환 및 화폐를 매개로한 유통. 소비. 다음의 생산을 위한 축적, 그리고 재생산 등의 모든 관계를 의미하지 않을까? 영어「Economy」(경제)는 헬라어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이것은 “집”을 뜹하는「Oikos」와 “법”을 뜻하는「Nomos」의 합성어로 가정적인 크기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여길 수 있는 것이다.
▲ 경제의 원리
1) 경제는 인간의 생활과 직결되어 있으며 경제 조직이 그 국가의 정책에 지배될 때는 경제와 정치는 거의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일체화(一體化)된다.
경제라는 말이 주는 의미와도 같이 경제 발전은 사회의 발전, 나아가서 인류 문명의 발전을 뜻하는 것이기에 인간 생존의 가장 중요한 측면을 담당하고 있다.
2) 칼빈은 말하기를「자기가 자진 사유 재한은 우연히 굴러 떨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소유하시는 하나님이 분배하심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라」고 하였다(기독교 강요 제2권, 8장 45절).
사유 재산에 대한 인정을 파괴하고 남의 재산을 침해하는 것을「도적」이라고 하는데 사유 재산의 침해는 원소유자인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경제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것을 인간에게 맡기셨고 맡은 인간은 최선을 댜하여 많은 이익을 남길 의무가 있다(마 25:14-30).
경제의 원리는「하나님의 것을 위탁받아 바로 사용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있다」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3) 따라서 기본적인 원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의 창조 목적의 완수이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물질이 필요하며 경제 질서란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둘째, 경제 조직은 개인의 사사로운 관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사회의 전체적 관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위배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개인성(個人性)과 사회성(社會性)을 함께 고려하여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같은 패조물인 동료 인간(Fellow-man)을 향한 봉사이다. 봉사할 능력이 있는 자는 이것을 피하지 말고 이루어야 한다.
▲ 경제의 질서
1)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고 말라」는 바울 사도의 준열한 선언은 이 땅에서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바른 삶의「스타일」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생활 태도인데 크리스챤은 바른 생활인으로서의 경제 질서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경제 질서란 자유주의 신학자인「에밀 부른너」가 정의한대로「생명 보존에 필요한 물질적 상품이 생산되고 분배 그리고 소비되는 과정」을 말한다.
2) 경제 질서는 다른 말로 바꾸면 경제 윤리(economic ethics)이다,
이것은 경제 형태와 조직 및 계급의 구성 등이 변천됨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 그러나 신학적 경제윤리는 크게 재화에 대한 금욕적 태도와, 하나님의 창조와 실제적 필요성에 입각한 긍정적 태도 이 두가지 입장에 의해 좌우되어 왔다. 이 금욕과 필요의 이중성을 어떻게 실천적 이론적으로 표현하느가에 따라 기독교의 경제윤리관도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3) 역사상 경제행위가 적극적으로 시인된 것은 종교개혁 때, 더욱이 칼빈주의에 의해 현세의 세속적 노동이 종교적으로 신성시되고 직업윤리가 확립되면서부터다. 그들은 경제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사회의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한 당연한 의무라고 했다. 그러나 바른 경제윤리를 파괴하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이다. 이에 대해 기독교는 경제 생활을 규율할 수 있는 최고의 윤리적 힘을 두고, 이것을 이기심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항수단으로 삼는다.
▲ 우리의 물질관
1) 경제란 물질에 관한 총친인 까닭에 물질에 관한 사상은 경제의 성패를 결정한다. 그렇다면 칼빈주�는 물질을 어떻게 보는가? 바울은「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느니라」(딤전 4:4)고 했다. 다시말하면 물질은 선(善)이다. 따라서 선한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선한 방법, 선한 목적으로 사용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것이 칼빈주의의 물질관이다.
2) 성경은 물질 자체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만 돈을 사랑하는 것을 정죄한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모든 산물을 인간을 위해서 주셨다. 그것은 노동을 통하여 잠시 동안 인간이 사용할 수 있도록 주신 것이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유하도록 주신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선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어져야 하는 것이 물질이고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서 성도는 물질을 바로 관리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물질의 양을 문제 삼지 않고 물질의 취득 방법이라든지, 물질을 사용하는 방법, 그리고 물질을 대하는 인간의 마음의 자세가 문제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사도 바울은 딤전 6:17, 18에서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게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딤전 6:6-10): 약 1:10 참조).
3) 그러면 우리의 바른 물질관은 무엇일까? 몇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한다.
A. 물질의 취득방법
성경은 여러곳에서 잘못된 물질 취득에 대하여 경고한다(출 20:15, 렘 22:13, 약 2:6, 5:4). 특별히 자기 방어를 할 수 없는 약자를 압박힘으로 부를 증대시키는 것을 금하고 또 책망하고 있다. 물질이란 이웃을 위하여 선한 목적에 사용될 위착물이지 이웃을 해칠 목적으로 맡겨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B. 물질의 사용벙법
물질이란 언제나 세력을 얻는 일에만 사용되지 않는다. 물질은 인간의 방종과 과장을 위해서도 사용된다. 그러나 성도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목적으로 물질을 사용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세상 물질을 보통 물질을 많이 소유하되 자신보다 불행한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이 가진 물건을 나누어주고 사치를 위해서나 자녀 교육을 위하여 지나친 낭비는 말아야 하며 탐심에서 오는 물질 남용은 하지 않아야 된다.
C. 물질에 대한 마음의 태도
물질에 대한 욕심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성도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자기 가족에게 어떤 물질적 혜택을 주려고 일하거나 장레를 위해서 일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집을 잘 돌보고 다스려야 한다(딤전 5:8). 그러나 우리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할 것이지, 타인의 것에 욕심을 가진다든지, 자신의 특수한 기술의 부족을 속이는 방법으로 해서는 안된다.
기독교 기업인은 이윤을 극대화해서는 안되며 항상 고객이나 종업원에게 최대 가치를 주는 경제 행위가 가장 가치있는 일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성도는 가징에서나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하나님을 기브시게 하느 것이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6) 칼빈주의 노동관(勞動觀)
하나님은 그의 뜻을 행하므로 언제나 선한 노동을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노동을 할 때는 하나님 앞에서 즐거운 마음을 갖도록 하였는데 그것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히 13:2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노동이란 바로 인간이 그의 삶을 위하여 하는 일이며 그의 가족이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이다(살후 3:10-13). 인간은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벌써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나타내고 발견하기 위하여 땅을 정복하고 노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예수님은 노동의 가치와 신성을 말했고(요 5:17, 4:34) 사도들도 노동은 죄가 아님을 계속 말하고 있다. 노동에 대한 신약의 윤리는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조용한 마음으로 일하는 것이다(살후 3:12). 위와같이 생각할 때 게으름은 죄악으로 간주되며 노동은 신성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게으름을 장려하고 하나님 앞에 직접 노동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을 두둔하는 것은 마치 거짓된 사랑과 자비를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런 사람은 이단들보다 더 악한 자들이라고 바울은 주장하고 있다(딤전 5:8, 13-16).
▲ 노동의 개념
1) 노동(Iabor)은 체력이나 지력을 써서 하는 일. 성경은 노동을 고귀한 것으로 간주한다(시 128:2, 잠 21:25, 살전 4:11). 따라서 나태함은 경계되었다(잠 6:6, 롬12:11, 살후 3:10). 노동자(품꾼)는 법의 보호를 받았다(신 24:14)>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노동(일)이라고 서술했다(창 2:2). 과중한 노동(종신토록 수고하는 것)은 저주의 결과다(창 3:17-19).
2) 여기에는 노동윤리(Labor ethies)가 따른다. 이것은 노동의 존엄성, 노동자의 권리, 적절한 작업시간과 작업환경, 적정 임금, 부녀자 및 연소자 노동의 보호 등을 다룬다. 신학적으로는 하나님 뜻에 따라 올바르게 노동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노동에 있어 어떤 조건이 하나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는가에 관심을 둔다.
3) 성경에 나타난 노동의 개념을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① 노동은 창조의 역사이다. 하나님은 창조의 일을 하셨다. 우주는 하나님의 손이 하신 일이요(시 8:3, 6, 19:1), 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되어졌다(시 33:6)>
② 노동은 사람의 일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일을 하게 되어 있다. 인간은 “공작 인간”(Homo Fabel)이다.
③ 노동은 비유적 사용법이다. 노동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은 신약에 자주 나온다. 노동은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사업이다(빌 2:20).
▲ 성경의 노동
1) 육체적 혹은 정신적 수고를 의미하는데, 즉 일반적으로 땅을 경작하고 개인과 사회의 필요한 것을 공급하기 위해 필요한 육체적 노력을 말한다. 게으름이야말로 정말 저주였으며(전 10:18), 노동은 언제나 축복을 받았다(출 34:21, 시 127:1, 잠 10:4, 21:5, 전 5:11).
하나님은 정직한 노동자에게 상을 베푸신다(창 26:12, 39:4, 시 10 7:36-37, 전 2:24). 노동자들은 법에 의해서 보호를 받았다(레 19:13, 신 24:14)) 주인은 노동자가 노예인이건 자유인이건 간에 자비로써 대해야 했다(엡 6:9, 빌레몬서). 일하는 자는 그의 삯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눅 10:7). 야곱은 아내를 얻기 위하여 노동했다(창 31:40-41). 많은 노동자들에게는 감독자가 있었다(롯 2:5, 삼상 11:5, 마 20:1, 고전 3:9).
2) 하나님은 창조때에 일(노동)하셨고(창1장). 계속하여 일하신다(시 104:24, 사 28:29). 인간은 이 창조를 수행하기 위하여 일을 부여받았다(창 2:15).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반드시 노동을 해야 하느것은 아니다. 그러나 죄는 노동에 대한 보상의 감소, 즉 그 소산을 감소시키고 좌절과 난관으로 이끈다(창 3:19). 성별로 인한 노동의 면제란 있을 수가 없다.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때때로 여자가 짐을 나르는 짐승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며, 남녀가 흔히 똑같은 일을 하였다. 예수도 일을 하였다(요 5:17). 바울도 역시 일했으며,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행 18:3, 살전 4:11, 살후 3:10).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를 따라나서기 전에는 모두 노동자들이었다.
▲ 우리의 노동관
1) 칼빈주의의 노동관은 다음과 같다.
① 청지기로서의 노동,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달란트(재능, 직업, 노동)를 맡겨 주셨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결산보고를 드릴 마음의 자세로 노동(직업)에 충성해야 한다(마 25:14-30).
② 소명(召命)으로서의 노동, 직업(노동)에 대한 소명은 바른 활동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가 된다. 칼빈주의자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직업(노동)에 충성해야 한다. 「섹스피어」가 한 말대로「집 앞의 뜰을 쓰는 것은 하나님의 동산의 일부분을 쓰는 것이다」란 것이 우리 생활의 주제가 되어야 하겠다.
2) 오늘날 기독교 사회에서 봉사하고 있는 위대한 업적이나, 일생을 통해서 기억될만한 특별한 노동의 업적이나 할만한 일은 하나님의 직접적 간섭 아래에서 사는 수많은 칼빈주의자들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칼빈주의자는 겉으로 인간의 마음을 기쁘게 하느것이라든지 그 일이 순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일은 무가치하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참된 일은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엡 4:7)하는 일을 가장 가치있는 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노동에 대하여 마키아벨리적 이론(Machiavelian aaaaaatheory)과 그 목적은 그리스도의 법정에 설 수 없는 이론이다(Niccolo Machia Velli는 이태리 Flovence의 외교가이며 정치가로 권모술수의 정책을 시도한 사람, 1469-1527). 참된 노동이란 인간을 간섭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에 보조를 맞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에 적응하여 살고자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기대하며 참된 삶의 보람과 재미을 갖고 사는 것이다.
3) 노동에는 몇가지 경계해야 할 한계점이 있다. 이 한계점은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하는 분수령이 되기도 한다.
첫재, 주일 성수 문제이다.
이것은 십계명이 우리에게 교훈해 주는 것으로「엿새 동안 힘써 일하고」라는 제한적인 문제이다. 우리 인간의 노동은 엿새동안 일하고 제칠일은 쉬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취하신 방법이요 인간이 따라야할 계명이다.
둘째, 책임(責任)문제이다.
위에서 말한대로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완수하여야 한다. 이것은 고용자와 피고용자가 함께 지켜야할 문제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노동 조건이 개선되지 못하여 여러 가지 사회악(社會惡)을 낳고 있는데 이것을 통해 책임 사회(責任社會)를 형성하여야 한다.
성경은 경제를 가르치는 경제 이론이나 교과서는 아니다. 그러나 경제는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칼빈주의의 근본사상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인간의 모든 삶의 원리요 표준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주의 경제관은 그것이 곧 성경적 경제관이다. 그런데 독일의 경제학자인 웨버(Marx Weber)는 자본주의이 기원은 기독교 정신, 곧 칼빈주의의 산물이라고 주장하였다.
▲ 경제의 이념
1) 인간은 무한한 옥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욕구를 그대로 충족 시킬 수는 없다. 인간이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는 객체(客體)의 분량은 인간의 욕구와의 관계에 있어서 항상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이 상대적 희소성 (相對的稀少性) 즉 인간의 욕구충족 대상의 희소성을 인간은 극복하여야 하며, 인간은 무한히 변화하는 욕구를 되도록 지속적으로 충족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충족에 있어서는 평화적으로 행사하여야 하며, 전쟁. 약탈. 폭력 등에 의해서는 안 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은 수단의 상대적 희소성, 평화적인 행사와 두 가지 요헌이 경제생활의 기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수단의 희소성을 극복하기 위하여서는 많은 물자가 필요하게 된다.
이에 인간은 노동(勞動)을 통하여 자연에 작용하면서 자연에서 물자를 얻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으로 인간은 자연과 밀접한 상호교섭(相互交涉)을 하는 것이다.
2) 그런데 인간은 고립하여 물자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일정한 사회관계 안에 들어가서 물자를 얻는다. 그러기 때문에 경제 생활은 인간과 자연의 상호관계인 동시에 인간 상호간의 사회관계(社會關係)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제생활은 사회적. 역사적인 성격을 갖이게 되며 따라서 역사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생활은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생존하기 위하여 많은 물자. 재화를 필요로 하는데 이� 농업. 어업. 광업 등을 통하여 얻는다. 농. 어. 광을 통하여 얻은 물자는 공업을 통하여 담당하는 것이 상업 유통과정이다. 이와같이 물자의 생산. 유통. 분배의 과정을 밟으면서 우리의 생활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경제 실태이다.
3) 따라서 생산과 분배와 소비의 복합적인 관계에 경제적 깊은 의의가 있다. 다시 말하면 경제의 개념은 생산을 노동. 노동의 결과로 얻어진 생산. 분배. 교환 및 화폐를 매개로한 유통. 소비. 다음의 생산을 위한 축적, 그리고 재생산 등의 모든 관계를 의미하지 않을까? 영어「Economy」(경제)는 헬라어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이것은 “집”을 뜹하는「Oikos」와 “법”을 뜻하는「Nomos」의 합성어로 가정적인 크기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여길 수 있는 것이다.
▲ 경제의 원리
1) 경제는 인간의 생활과 직결되어 있으며 경제 조직이 그 국가의 정책에 지배될 때는 경제와 정치는 거의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일체화(一體化)된다.
경제라는 말이 주는 의미와도 같이 경제 발전은 사회의 발전, 나아가서 인류 문명의 발전을 뜻하는 것이기에 인간 생존의 가장 중요한 측면을 담당하고 있다.
2) 칼빈은 말하기를「자기가 자진 사유 재한은 우연히 굴러 떨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소유하시는 하나님이 분배하심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라」고 하였다(기독교 강요 제2권, 8장 45절).
사유 재산에 대한 인정을 파괴하고 남의 재산을 침해하는 것을「도적」이라고 하는데 사유 재산의 침해는 원소유자인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경제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것을 인간에게 맡기셨고 맡은 인간은 최선을 댜하여 많은 이익을 남길 의무가 있다(마 25:14-30).
경제의 원리는「하나님의 것을 위탁받아 바로 사용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있다」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3) 따라서 기본적인 원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의 창조 목적의 완수이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물질이 필요하며 경제 질서란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둘째, 경제 조직은 개인의 사사로운 관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사회의 전체적 관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위배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개인성(個人性)과 사회성(社會性)을 함께 고려하여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같은 패조물인 동료 인간(Fellow-man)을 향한 봉사이다. 봉사할 능력이 있는 자는 이것을 피하지 말고 이루어야 한다.
▲ 경제의 질서
1)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고 말라」는 바울 사도의 준열한 선언은 이 땅에서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바른 삶의「스타일」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생활 태도인데 크리스챤은 바른 생활인으로서의 경제 질서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경제 질서란 자유주의 신학자인「에밀 부른너」가 정의한대로「생명 보존에 필요한 물질적 상품이 생산되고 분배 그리고 소비되는 과정」을 말한다.
2) 경제 질서는 다른 말로 바꾸면 경제 윤리(economic ethics)이다,
이것은 경제 형태와 조직 및 계급의 구성 등이 변천됨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 그러나 신학적 경제윤리는 크게 재화에 대한 금욕적 태도와, 하나님의 창조와 실제적 필요성에 입각한 긍정적 태도 이 두가지 입장에 의해 좌우되어 왔다. 이 금욕과 필요의 이중성을 어떻게 실천적 이론적으로 표현하느가에 따라 기독교의 경제윤리관도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3) 역사상 경제행위가 적극적으로 시인된 것은 종교개혁 때, 더욱이 칼빈주의에 의해 현세의 세속적 노동이 종교적으로 신성시되고 직업윤리가 확립되면서부터다. 그들은 경제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사회의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한 당연한 의무라고 했다. 그러나 바른 경제윤리를 파괴하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이다. 이에 대해 기독교는 경제 생활을 규율할 수 있는 최고의 윤리적 힘을 두고, 이것을 이기심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항수단으로 삼는다.
▲ 우리의 물질관
1) 경제란 물질에 관한 총친인 까닭에 물질에 관한 사상은 경제의 성패를 결정한다. 그렇다면 칼빈주�는 물질을 어떻게 보는가? 바울은「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느니라」(딤전 4:4)고 했다. 다시말하면 물질은 선(善)이다. 따라서 선한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선한 방법, 선한 목적으로 사용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것이 칼빈주의의 물질관이다.
2) 성경은 물질 자체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만 돈을 사랑하는 것을 정죄한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모든 산물을 인간을 위해서 주셨다. 그것은 노동을 통하여 잠시 동안 인간이 사용할 수 있도록 주신 것이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유하도록 주신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선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어져야 하는 것이 물질이고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서 성도는 물질을 바로 관리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물질의 양을 문제 삼지 않고 물질의 취득 방법이라든지, 물질을 사용하는 방법, 그리고 물질을 대하는 인간의 마음의 자세가 문제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사도 바울은 딤전 6:17, 18에서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게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딤전 6:6-10): 약 1:10 참조).
3) 그러면 우리의 바른 물질관은 무엇일까? 몇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한다.
A. 물질의 취득방법
성경은 여러곳에서 잘못된 물질 취득에 대하여 경고한다(출 20:15, 렘 22:13, 약 2:6, 5:4). 특별히 자기 방어를 할 수 없는 약자를 압박힘으로 부를 증대시키는 것을 금하고 또 책망하고 있다. 물질이란 이웃을 위하여 선한 목적에 사용될 위착물이지 이웃을 해칠 목적으로 맡겨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B. 물질의 사용벙법
물질이란 언제나 세력을 얻는 일에만 사용되지 않는다. 물질은 인간의 방종과 과장을 위해서도 사용된다. 그러나 성도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목적으로 물질을 사용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세상 물질을 보통 물질을 많이 소유하되 자신보다 불행한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이 가진 물건을 나누어주고 사치를 위해서나 자녀 교육을 위하여 지나친 낭비는 말아야 하며 탐심에서 오는 물질 남용은 하지 않아야 된다.
C. 물질에 대한 마음의 태도
물질에 대한 욕심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성도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자기 가족에게 어떤 물질적 혜택을 주려고 일하거나 장레를 위해서 일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집을 잘 돌보고 다스려야 한다(딤전 5:8). 그러나 우리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할 것이지, 타인의 것에 욕심을 가진다든지, 자신의 특수한 기술의 부족을 속이는 방법으로 해서는 안된다.
기독교 기업인은 이윤을 극대화해서는 안되며 항상 고객이나 종업원에게 최대 가치를 주는 경제 행위가 가장 가치있는 일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성도는 가징에서나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하나님을 기브시게 하느 것이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6) 칼빈주의 노동관(勞動觀)
하나님은 그의 뜻을 행하므로 언제나 선한 노동을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노동을 할 때는 하나님 앞에서 즐거운 마음을 갖도록 하였는데 그것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히 13:2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노동이란 바로 인간이 그의 삶을 위하여 하는 일이며 그의 가족이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이다(살후 3:10-13). 인간은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벌써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나타내고 발견하기 위하여 땅을 정복하고 노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예수님은 노동의 가치와 신성을 말했고(요 5:17, 4:34) 사도들도 노동은 죄가 아님을 계속 말하고 있다. 노동에 대한 신약의 윤리는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조용한 마음으로 일하는 것이다(살후 3:12). 위와같이 생각할 때 게으름은 죄악으로 간주되며 노동은 신성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게으름을 장려하고 하나님 앞에 직접 노동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을 두둔하는 것은 마치 거짓된 사랑과 자비를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런 사람은 이단들보다 더 악한 자들이라고 바울은 주장하고 있다(딤전 5:8, 13-16).
▲ 노동의 개념
1) 노동(Iabor)은 체력이나 지력을 써서 하는 일. 성경은 노동을 고귀한 것으로 간주한다(시 128:2, 잠 21:25, 살전 4:11). 따라서 나태함은 경계되었다(잠 6:6, 롬12:11, 살후 3:10). 노동자(품꾼)는 법의 보호를 받았다(신 24:14)>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노동(일)이라고 서술했다(창 2:2). 과중한 노동(종신토록 수고하는 것)은 저주의 결과다(창 3:17-19).
2) 여기에는 노동윤리(Labor ethies)가 따른다. 이것은 노동의 존엄성, 노동자의 권리, 적절한 작업시간과 작업환경, 적정 임금, 부녀자 및 연소자 노동의 보호 등을 다룬다. 신학적으로는 하나님 뜻에 따라 올바르게 노동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노동에 있어 어떤 조건이 하나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는가에 관심을 둔다.
3) 성경에 나타난 노동의 개념을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① 노동은 창조의 역사이다. 하나님은 창조의 일을 하셨다. 우주는 하나님의 손이 하신 일이요(시 8:3, 6, 19:1), 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되어졌다(시 33:6)>
② 노동은 사람의 일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일을 하게 되어 있다. 인간은 “공작 인간”(Homo Fabel)이다.
③ 노동은 비유적 사용법이다. 노동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은 신약에 자주 나온다. 노동은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사업이다(빌 2:20).
▲ 성경의 노동
1) 육체적 혹은 정신적 수고를 의미하는데, 즉 일반적으로 땅을 경작하고 개인과 사회의 필요한 것을 공급하기 위해 필요한 육체적 노력을 말한다. 게으름이야말로 정말 저주였으며(전 10:18), 노동은 언제나 축복을 받았다(출 34:21, 시 127:1, 잠 10:4, 21:5, 전 5:11).
하나님은 정직한 노동자에게 상을 베푸신다(창 26:12, 39:4, 시 10 7:36-37, 전 2:24). 노동자들은 법에 의해서 보호를 받았다(레 19:13, 신 24:14)) 주인은 노동자가 노예인이건 자유인이건 간에 자비로써 대해야 했다(엡 6:9, 빌레몬서). 일하는 자는 그의 삯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눅 10:7). 야곱은 아내를 얻기 위하여 노동했다(창 31:40-41). 많은 노동자들에게는 감독자가 있었다(롯 2:5, 삼상 11:5, 마 20:1, 고전 3:9).
2) 하나님은 창조때에 일(노동)하셨고(창1장). 계속하여 일하신다(시 104:24, 사 28:29). 인간은 이 창조를 수행하기 위하여 일을 부여받았다(창 2:15).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반드시 노동을 해야 하느것은 아니다. 그러나 죄는 노동에 대한 보상의 감소, 즉 그 소산을 감소시키고 좌절과 난관으로 이끈다(창 3:19). 성별로 인한 노동의 면제란 있을 수가 없다.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때때로 여자가 짐을 나르는 짐승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며, 남녀가 흔히 똑같은 일을 하였다. 예수도 일을 하였다(요 5:17). 바울도 역시 일했으며,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행 18:3, 살전 4:11, 살후 3:10).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를 따라나서기 전에는 모두 노동자들이었다.
▲ 우리의 노동관
1) 칼빈주의의 노동관은 다음과 같다.
① 청지기로서의 노동,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달란트(재능, 직업, 노동)를 맡겨 주셨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결산보고를 드릴 마음의 자세로 노동(직업)에 충성해야 한다(마 25:14-30).
② 소명(召命)으로서의 노동, 직업(노동)에 대한 소명은 바른 활동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가 된다. 칼빈주의자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직업(노동)에 충성해야 한다. 「섹스피어」가 한 말대로「집 앞의 뜰을 쓰는 것은 하나님의 동산의 일부분을 쓰는 것이다」란 것이 우리 생활의 주제가 되어야 하겠다.
2) 오늘날 기독교 사회에서 봉사하고 있는 위대한 업적이나, 일생을 통해서 기억될만한 특별한 노동의 업적이나 할만한 일은 하나님의 직접적 간섭 아래에서 사는 수많은 칼빈주의자들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칼빈주의자는 겉으로 인간의 마음을 기쁘게 하느것이라든지 그 일이 순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일은 무가치하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참된 일은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엡 4:7)하는 일을 가장 가치있는 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노동에 대하여 마키아벨리적 이론(Machiavelian aaaaaatheory)과 그 목적은 그리스도의 법정에 설 수 없는 이론이다(Niccolo Machia Velli는 이태리 Flovence의 외교가이며 정치가로 권모술수의 정책을 시도한 사람, 1469-1527). 참된 노동이란 인간을 간섭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에 보조를 맞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에 적응하여 살고자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기대하며 참된 삶의 보람과 재미을 갖고 사는 것이다.
3) 노동에는 몇가지 경계해야 할 한계점이 있다. 이 한계점은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하는 분수령이 되기도 한다.
첫재, 주일 성수 문제이다.
이것은 십계명이 우리에게 교훈해 주는 것으로「엿새 동안 힘써 일하고」라는 제한적인 문제이다. 우리 인간의 노동은 엿새동안 일하고 제칠일은 쉬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취하신 방법이요 인간이 따라야할 계명이다.
둘째, 책임(責任)문제이다.
위에서 말한대로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완수하여야 한다. 이것은 고용자와 피고용자가 함께 지켜야할 문제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노동 조건이 개선되지 못하여 여러 가지 사회악(社會惡)을 낳고 있는데 이것을 통해 책임 사회(責任社會)를 형성하여야 한다.
출처 : 모 세(Moses)
글쓴이 : 모 세(Mose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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