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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충성하라

좁은길을 걸으며 2005. 7. 2. 23:23
 

죽도록 충성하라                    2005/07/03/주일/

                    (요한계시록2장8-11절)


우리는 건전한 교단의 교회에 소속을 두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매우 소중한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우리 서광교회가 어떤 교단 소속의 교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서광교회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측 교단에 소속된 교회입니다.

왜 교단이 중요하냐 하면 교단마다 분명한 신학과 신앙 노선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중요한 것은 무게 있고 실력있는 목사를 양성하는 신학대학교와 신학대학원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예장 합동측 교단은 장로교 선교사 언드우드가 들어오면서부터 지금까지 가장 건전한 신학과 신앙노선을 걸어오면서 한국교회를 대표할만한 훌륭한 목사님들을 가장 많이 배출해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무조건 좋은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 개교회들은 나름대로 개성을 가지고 주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오늘도 그의 보내신 성령님을 통해서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를 순방하고 하고 계십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비록 지상의 교회들이 불안전한 면이 있고 부족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그 모든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게 보낸 편지이자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도 예언서에 해당하는 책입니다.


일곱교회라 함은 에베소교회, 서머나교회, 버가모교회, 두아디라교회, 사데교회, 빌라델비아교회, 라오디게아교회를 가리키는데, 이 일곱교회는 지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교회의 대표성을 띠고 있다 하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역사 위에 수없이 많은 교회들이 존재한다 하여도 이 일곱교회의 한 부류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일곱교회는 대체적으로 다시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➀에베소교회, 버가모교회, 두아디라교회처럼 칭찬 반, 책망 반의 교회가 존재하며,

➁서머나교회, 빌라델비아교회처럼 창찬만 받은 교회도 있을 것이며,

➂사데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처럼 매섭게 책망을 받은 교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 우리 서광교회는 어느 부류에 속한 교회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아니 앞으로 우리 서광교회는 어느 교회처럼 되어져야 한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우리 서광교회는 서머나교회처럼 되어야 하고 빌라델비아교회처럼 되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의 이상은 이런 교회가 아니라, 대교회주의의 이상이랄까 이런 데 맞물려 있습니다. 매우 심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전주에서 어느 교회가 숫자가 많고 요즘말로 잘 나가느냐에 따라 주가가 먹여지는 현실이 너무나도 맘이 아픕니다.


우리는 오늘 읽은 본문의 서머나교회를 살펴보면서 우리 교회의 이상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8절).


서머나교회는 에베소교회의 정북방으로 하루 여행길 되는 곳(56km)에 우치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터키의 이즈메르로 불립니다.

지도를 보면 그곳은 항구를 끼고 있어서 유럽으로 가는 출구로 이용되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그 당시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가끔 기독교인들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로 인해서 심한 박해를 받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은 이유 중에 하나가 “가이사는 주님이시다!”라고 황제숭배를 강요당하던 때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일곱교회 지역까지도 모두 로마 식민지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일제 신사참배의 때와 거의 유사한  숭배를 강요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서 서머나교회 역시 편지를 받았는데...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계시가 적혀져 있는 편지였습니다.

서머나교회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8절)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알파와 오메가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1:8)이신 전능한 하나님이시며, 한편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이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 메시지를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9절).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의 형편을  가장 잘 아는 분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가정의 형편, 우리 서광교회의 형편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지금 서머나교회가 당하고 있는 현실, 즉 ‘환난과 궁핍’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럴 때 주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왜 나를 돌아봐 주시지 않습니까?”하고 원망이 터져나오기가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시며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환난(afflictions; suffering)’은 기독교인 됨의 표지라고 할 만큼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신앙인들은 고난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늘날의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의 이슈는 “즐겁게 신앙생활 하자!”가 구호입니다.

어떻게 보면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좀 멉니다.

예수님은 “고난 중에도 즐거하는 것”을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신앙은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는 신앙이 아니라, 아예 고난을 없애버리는 신앙입니다. 아니 고난을 피해가는 신앙입니다.


서머나교회는 고난을 즐겁게 받았습니다. 황제숭배를 강요당했지만 그것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찾아오는 것은 ‘환난’, ‘궁핍’, 그리고 ‘훼방’이었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투옥’과 ‘순교’라는 고통이 따라왔습니다.


이런 고통을 감수하고 있는 서머나교회 성도들에게 우리 주님은 “실상은 네가 부자라!”(9절)라고 하셨습니다.

왜 부자입니까? 예수 믿기 때문에 핍박받고 가난하게 사는 교인들을 향해서 “실상은 네가 부자라!” 했으니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부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교회는 어떤 교회가 부자입니까?

우리는 당돌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급 인테리어와 화려한 강단과 조명시설, 그리고 멋진 찬양대, 그리고 일류 밴드, 그리고 어마어마한 교인 숫자를 모아 놓은 교회가 부자입니까?

물론 그런 교회가 다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눈에는 작은 교회 목회자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빼게 하는 부자교회의 간접횡포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아는지 모르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겉보기에 화려하지만 이미 불량주의에 익숙해진 교회들, 선교헌금 몇 푼 해 놓고 생색은 다 내는 대형교회들, 그리고 자본주의 시장을 독점하는 대형마트처럼 되어버려 작은교회 교인들을 알게 모르게 다 독식해버린 교회들을 향해 입을 열어 누가 감히 말 한 마디라도 제대로 하겠습니까?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9절).

그곳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기독교의 훼방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율법주의 신앙을 고집하면서 복음을 바르게 믿는 서머나교회 성도들에게 엄청난 암초덩어리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에게 교묘한 방법으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해 주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로 몰고 가고자 하는 음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집단을 향해 예수님은 ‘사단의 회’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마귀의 총회’라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 주님은 서머나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나을 받으리라”(10절).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예수 믿으면 핍박이 없을 것이다! 걱정마라!” 그러신 적이 없다.

오히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 알라!”(요15:18)고 하셨다.

로버트 머레이 맥케인은 “만일 당신이 바닷가에 서 있게 되면 아주 잔잔한 물결 다음에 아주 큰 물결이 밀려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시련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큰 시련을 예비하시려고 먼저 작은 시련을 보내신다. 그러나 전혀 그것들을 두려워 말라! 우리 주님이 가까이 오셔서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십일은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가리킨다.

아이언 버클레이는 “시련이라는 것은 알곡인가? 쭉정이인가를 입증하기 위해서 만나야 할 한 과정일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서광교회는 어쩌면 핍박이 있어서 시련이 아니라, 대형교회들의 독식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를 받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정말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취향 따라서 시설 좋고 인기스타가 출연하는 분위기의 교회를 나갈 것인가 아니면 “심겨진 곳에서 기어코 꽃을 피울 것인가?”

우리는 심겨진 곳에서 기어코 꽃을 피우고 말 것입니다.


지금 우리 주일학교는 부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중고등부도 부흥 할 것입니다.

대형 교회는 부모가 신앙생활 하는 자녀만 교회에 출석합니다. 장년이 5천 명이라도 주일학교는 200명도 안 됩니다. 우리 서광교회는 장년 숫자나 주일학교 숫자나 같습니다. 그리고 불신자 가정 아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면에서 정말 소망 있는 교회입니다.

앞으로 중고등부도 그와 같이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10절).

이 사실 한 가지가 우리 맘을 능력있게 만들어 줍니다.

“너희가 비록 숫자가 적어서 고통 받고 가난한 사람들만 모인 교회냐? 그래 내가 안다! 서광교회 성도들아! 그러나 너희가 진짜 영적으로 볼 때는 부자다! 걱정마라.

그렇지만 너희 서광교회 성도들아,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목사인 나는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우리 성도들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똘똘 뭉쳐서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갑시다.

우선 주일학교 부흥에 있어서 온 교우들이 “죽도록 충성하십시오!” 큰 교회들에게 위축되지 말고, 비교도 하지 말고 참된 복음의 말씀만을 신실하게 붙잡고 지역전도에 나섭시다.

지금까지 우리가 “죽도록 충성하지 않았습니다!”

가령 교사를 임명을 했어도 심지어 도망쳐 다는 사람, 아예 교회를 안 나오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몰라서 그랬겠죠. 그렇지만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 여러분, 한 번 죽도록 충성합시다.

죽을 것 각오하고 덤비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죽기까지 물러서지 말자는 말입니다.

[목숨까지도 바쳐서 싸움터로 나가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