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탄한 인생 다니엘
a solid life of Daniel
Một cuộc sống vững chắc Đa-ni-ên
- 다니엘 1장 1-21절-
1. 학문을 통해서
2. 하나님 경외를 통해서
3. 역경을 통해서
-들어가는 말-
이 세상에 나올 때부터 탄탄한 인생은 없다. 육신의 눈으로 볼 때는 보다 나은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우리 선택의 몫이 아니다. 그러니 만큼 이것을 가지고 불만을 토로하거나 누구를 원망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감사하며 거기서 최선을 다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
그 주어진 현실이란 "하나님께서 오늘 나를 여기에 있게 하셨다."라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다니엘의 경우 처음부터 왕족이었거나 귀족의 신분이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볼 때는 불행이 닥쳐왔다. 바벨론 포로가 웬 말인가? 다니엘은 "왜 하필이면 이 시대에 내가 태어나서 천한 포로의 자리까지 전략되었는가?"하고 원망하지 않았다.
이런 운명은 그 민족이 다같이 겪어야 하는 마음으로 그냥 받아들여야만 했을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한 유다가 망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왕을 요구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분열 왕국을 거치면서 남쪽 지역을 유다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백성의 희망은 주로 남쪽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나마 남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선왕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지자들은 박해하고 하나님의 법도를 외면하고 이방 풍습을 따르며 타락을 일삼아 왔다. 그러다가 결국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개혁의 왕이라고 일컫는 요시야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다. 요하난, 여호야김(엘리야김), 여호아하스(살룸), 시드기야였다. 여호야김의 애굽의 포로가 된 여호아하스를 대신해서 11년을 통치했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여고냐)이 18세에 왕이 되어 3개월 동안 치리 하다가 결국에는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가 11년 동안 반(反) 바벨론 정책을 펴다가 결국 멸망하기에 이른다.
이런 가운데서도 탄탄한 인생의 준비를 한 인물이 바로 다니엘이다.
1. 학문을 통해서
다니엘은 꿈의 사람이다. 꿈이 있는 사람의 특징은 자신이 가야 하는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그에 맞는 준비로서의 학문의 과정이 필요하다.
꼭 교실의 수업이 아니라도 그렇다. 그 분야에 맞는 지식, 경험을 쌓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격에 맞는 인품까지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대비한다.
다니엘은 그런 가정을 거친 분비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네느갓네살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성전에 있는 그릇들을 빼앗아다가 시날에 있는 신전 보물창고에 두기까지 했다.
왕은 뜻하지 않게 유다에서 포로로 잡아 온 자 중에 뛰어난 인재를 기용할 생각을 품게 된다.
그래서 환관장에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 중에서" -다니엘 1장 3절- '황실 학교' 입학시켜 인재로 키울만한 청소년을 선발해서 특별한 음식, 즉 왕의 진미를 먹게 하고 또 갈대아의 학문과 언어를 배우게 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이때에 뽑힌 사람이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였다.
그들은 황실 학교의 인재교육을 3년 동안 받아야 했다. 그렇다. 창세기의 요셉 역시 하루아침에 애굽가 된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왕의 신하 친위대장의 집에서 경험을 쌓고 애굽 문화를 익숙하게 파악하는 과정을 거쳤다. 또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거쳤다.
이런 과정이 단순히 트리에닝 코스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영적 학교'를 통해서 애굽나라와 궁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파악할 수 있는 과정을 거친 것이 된다.
모세도 그렇고 사무엘도 그런 과정들이 있었다. 따라서 다니엘에게도 하나님께서 그 인생의 장래에 걸맞은 훈련과정을 통해서 모든 학문에 능하도록 하셨다.
그러니까 느브갓네살이 이런 선택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으며 또 거기에 걸맞은 용모와 학문까지도 겸비하게 하셨던 과정이 있었다.
나도 내 나름대로 깨달은 것이 있다. "내가 지내오면서 배우고 익혔던 것은 아름다운 것들은 버릴 것이 없다."
내가 어렸을 때 농촌에서 자랐다. 그리고 물고기를 잘 잡았다. 또 특별히 음악을 접하고 자랐다. 농업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요리 솜씨 좋은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지금에 와서 보면 내가 그것들을 써먹고 살고 있는 것을 보게 되고 또한 그것을 통해서 여기 사람들을 전도하는 접촉점 또는 전도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다니엘은 그냥 황실학교에 발탁된 것이 아니다. 부정입학생이 아니다.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 하여 왕구에 설만한 소년" -다니엘 1장 4절-이기에 발탁된 것이다.
괜히 길가는 사람 잡아다가 훈련시킨 것에 아니고 적어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성실한 인물, 또는 인재를 통해서 역사를 이뤄가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늘날도 우리가 세상 초등학문에다가 목숨을 거는 것으로 다 된 것으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자녀교육이라는 것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나의 자녀를 어디에 쓰실까?"라는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생각하며 교육할 줄 안다면 훌륭한 교육자이며 좋은 아버지 어머니일 것이다.
모세는 궁정에서 학문과 무술을 익히며 궁정에서 자랐지만 어머니 요게벳의 여적 지도와 기대와 소망 속에서 자랐던 인물이다.
다니엘의 인생의 과정도 어쩌면 단 하루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 생각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 결과적으로 다니엘은 벨사살 왕의 잘 해석하여 이방 나라에서 셋째 통치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을 보는 선지자로서 미래에 바벨론 - 패르시아 - 그리스(헬라) - 로마 나라가 건설되고 멸망할 것에 대한 예언과 더불어 세상 종말에 대한 이상을 보며 예언하는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2. 하나님 경외를 통해서
다니엘의 최고의 멋은 '하나님 경외'에 있었다. 우리 인생의 멋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들이 아직도 세상 헛된 부귀영화에 맘을 뺏기고 산다면 개탄스런 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수많이 크리스천들이 헛된 데 눈을 돌리고 거기에 목을 매며 살아가고 있다.
이 어찌된 일인가! 우리가 그렇게도 시시한 하나님, 시시한 예수를 믿고 산다는 말인가!
다니엘은 그런데 눈을 뜨지 않았다. 그는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인물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은 심판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의식한다면 이제라도 회개하고 돌이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일에 몰두해야 한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멋진 삶의 출발이다.
다니엘은 왕의 진미를 거절했다. 그는 우상과 술에 관련된 것에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기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크리스천이라면 술과 담배 그리고 도박 같은 것에서 먼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요즘 한국교회 초기의 미덕이 사라진 모습 속에 살고 있지 않는가! "뭐 그것이 예수 믿는 일에 중요합니까? 더 중요한 것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맞다.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크리스천의 기본이다." 왜냐고요? 성령 충만한 삶과 밀착된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술 담배, 카지노 등을 배회하면서 사는 사람이 그 외에 다른 죄악에는 어떻겠는가!
우리는 기본을 중요시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다니엘을 보라.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나하리라 (결심)하고..." -다니엘 1장 8절-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일정한 지조 또는 신조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No, No, No 할 줄 아는 강한 믿음의 사람으로서 살았다.
역시 신약성경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에베소서 5장 3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에베소서 5장 18절-
이것은 우리 인생을 탄탄대로로 가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기초가 약한 집은 무너지듯이 신앙의 기초가 없으면 탄탄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러니까 다니엘이 이렇게 행한 것은 '하나님의 경외'와 관련된 직접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포기하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자칫하면 큰 위협이 닥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호했다.
이유가 뭐냐고요? 하나님을 경외에 장애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양심에 가책을 받아가면서까지 술잔을 들며 교회와 예수를 얘기를 하며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자가 있다면 얼마나 한심스러운 일이겠는가!
다니엘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말했다. "저희에게 열흘 동안만 시험해 보세요. 저희가 채소만 먹겠습니다." -다니엘 1장 12절-
환관장이 그들의 말에 따라서 시험을 해 보았다. 놀라웁게도 그들의 얼굴은 왕의 진미를 먹는 자들보다 더 빛나고 아름답게 되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영적시험에서 승리했다. '하나님 경외'의 진실함에는 반드시 영적 승리가 따른다.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예레미야 17장 7절-
3. 역경을 통해서
우리 인생 앞에는 누구에게나 역경이 따른다. 그러나 역경을 피해가고도 잘 된 사람은 오히려 나중에 문제가 된다.
악인이 흥하는 것 같이 보이는 세상에서 우리도 그런 유혹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독약이나 만찬 가지이다.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잠언 24장 1절-
우리 인간은 항상 근시안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원시안적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에 따르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때에만 우리는 원시안적이 된다.
다니엘은 느브갓네살의 꿈을 해몽해 주고 바벨론 온 지방을 다스리게 되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왕이 이에 다니엘을 높여 귀한 선물을 주며 그를 세워 바벨론 온 지방을 다스리게 하며 또 바벨론 모든 지혜자의 어른을 삼았으며..." -다니엘 2장 48절-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다니엘은 탄탄대로의 인생으로 탈바꿈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높여주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시름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방 나라에서 큰 영예를 얻는 것보다 자기 민족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심정이 자기가 얻은 영예보다 더 큰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다음에 따라오는 것은 "금신상에게 절 하라." -다니엘 3장 5절-는 시험이었다. 안 그러면 불무 속에 던짐을 받게 되는 무서운 불시험이었다.
바로 이것을 견뎌냈던 것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멋진 신앙인들이었다.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그 신상 숭배를 거절했다.
"그렇게 하니 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다니엘 3장 18절-
그들은 활활 타오르는 풀물 불,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거운 풀무불에 던짐을 받았으나 옷깃 하나, 머리털 하나 타지 않고 살아 나올 수 있었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셨다. 구약의 신현 神顯, theophany, 곧 그리스도의 현현을 체험한 것이다.
사실은, 내가 볼 때 그것은 '하나님의 현현顯現', 곧 천사가 나타난 것이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탄탄한 인생에는 '하나님의 보호와 개입'이 따른다.
왕이 바뀌는 과도기가 있었다. 느브갓네살 통치로 계속 이어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것은 인간 생각일 뿐이다.
왕이 바꿨지만 다니엘이 높은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을 열어주셨다. 그것은 벨사살 왕이 봤던 환상을 해석해 주었기 때문이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자를 본 벨사살은 다니엘을 통해 그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환상의 내용이 그에게는 오히려 큰 화가 미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다니엘은 이것을 해석함으로써 오히려 큰 권력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매데로 나라가 들어서고 새로운 다리오라는 왕이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권력의 자리에는 너무나 큰 유혹이 따라왔다. 다니엘이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세 총리 중 하나로 발탁되자 이를 시기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를 죽음에 몰아넣을 모사를 꾸미는 자들이 있었다. 왕은 그것도 모른 채 그 모사꾼들의 말을 승낙했다.
"이제부터 삼십을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다니엘 6장 7절-
바로 다니엘의 약점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니엘은 왕의 어명이 내린 줄 알고도 그 습관대로 동쪽 창을 열고 하루에 새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다.
"다니엘이 왕의 조서에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 6장 10절-
이 때문에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짐을 받았다. 이 엄청난 시련이 다니엘에게 다가왔지만 다니엘은 오히려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자 밥이 될 줄 알았던 다니엘은 오히려 사자들에게 도움을 받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해버리셨다. 할렐루야!
우리는 여기에서도 '그리스도의 손 길'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지 못한 다니엘의 대적자들은 그 음모가 드러나게 되고 오히려 사자굴에 던져지게 되었다. 사자 굴에 던져질 때 그들의 몸이 땅에 닿기도 전에 사자들이 오도독 오도독 그들을 받아 채서 씹혀 먹히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시련 속에서 더 탄탄한 인생으로 바뀌게 된다.
돈이 많아서 탄탄한 인생이라고요? 권력이 많아서요? 그 돈, 그 권력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멀리 뛰기 선수가 되어야 한다. 높이 뛰기 선수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시온성을 바라보고 가야 한다. 우리는 저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가야 한다.
이렇게 할 줄 아는 인생이 탄탄한 인생이다. 다니엘처럼...
-나가는 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탄탄한 인생일까!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잠언 18장 10절-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 성령 안에서만 탄탄한 인생을 펼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세상의 유혹의 그물에 걸려 망신과 패망을 겪은 후에야 후회하며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것이다.
다니엘의 인생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연관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다니엘은 신앙의 지조를 지켰고 또 열심히 학문의 과정을 거쳤다.
이럴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필요한 모든 지혜와 지식으로 치워주셨다. 즉 그에게 '능력 주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다니엘 1장 17절-
그 결과는 그는 미래에 인류익사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조망했다. 바로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으로서 말이다.
그렇다. 이것이 탄탄한 인생을 사는 바른 길이다. 다른 데서 찾는 인생은 바보 인생이 되고 만다.
다니엘과 함께 계시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와도 함께 계시기를 원하신다. 다니엘에게 계시를 깨닫게 해 주신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의 영과 지혜로 함께하시기를 원하신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에베소서 2장 17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외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4장 12,13절-
이런 모습으로까지 살아갈 줄 알 때에 탄탄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순금 같은 신앙'은 반드시 시련의 영광로를 거쳐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나도 탄탄한 인생을 살 수 있다! I can live a solid life too!"